어제 밤, 한 통의 문자가 왔다. 눈이 내린다고 행복하라고. 창 밖을 보니 마당(루인의 입장에서 마당이다, 주인집의 입장에선 옥상이고;;)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형광등을 끄고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줄도 몰랐다.

눈을 보면 항상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다. 설레고 좋은 몸, 금방 지저분할 것 같은 불안함, 녹으면서 사라지길 바라는 것들에 대한 기대, 그리고 마주하기 겁나서 살짝 덮어두고 외면하고 있는 것들이 곧 드러날 것 같은 두려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몸들이 복잡하게 고개를 들이민다.

아침이 되고 오후 햇살이 나쁘지 않았는데도 장독 위, 텅 빈 화분 위에 쌓인 눈이 아직도 녹지 않고 있다. 밤을 견디면 얼음이 되려나. 그렇게 얼어버리면 아픈 것들도 조금은 더 쉽게 견딜 수 있으려나. 무뎌진 몸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다가 해빙의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를 품는다.

녹지 않은 눈을 보며, 그렇게 얼어가는 풍경을 보며, 그렇게 숨어버리면 좋겠다. 꽁꽁 숨어서 한 겨울 견디고 나면 살면서 만난 아픔들에 무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렇겐 안 되겠지? 이런 바람과는 상관없이 금방 눈은 녹을 테고 흉터 자국은 여전히 환하게 빛나겠지. 종종, 숨고 싶은 순간이 절실한 만큼이나 숨기고 싶은 것들을 까발리고 싶으니까. 그냥 이틀, 어제 오늘해서 딱 이틀만 이렇게 숨고 숨기고 지내는 거지, 뭐.


덧.
참, 조금 있으면 외출한다. 이랑 친구 카카키오의 공연이 있어서. 카카키오의 공연은 자주 있었지만 그간 기회가 여의치 않아 못가다가 오늘은 가야지, 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걸어가야지. 눈에 신발이 젖고 옷이 젖으면 그 차가움 만큼 다시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길 테니까.
2005/12/04 18:29 2005/12/0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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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akakio  2005/12/05 0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운데 먼길 걸어와서 공연 즐겨주셔서 고마워요^^;;
    짐 부틀렉 듣고 있는데 민망--;;
    담 세미나때 봐요.
    • 루인  2005/12/05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맙다뇨? 카카키오가 얼른 유명해지면 되는 걸요..크크크. 그때까지 카카키오 공연에 열심히 다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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