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들었다. 어째서인지 집에 라디오가 있었고 작동법을 모를 때는 그냥 기기를 가지고 놀았고, 작동법을 배운 뒤로는 무언가를 들었다. 집에 하나 있는 라디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고 그래서 라디오로 무언가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언젠가는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ㅂㅎ 전파가 잡힌 적도 있어(당시 부산에 살았다) 깜짝 놀라기도 했는데, 매우 짧은 찰나였고 다시 잡히는 일은 없었다.

독립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하며 라디오는 특히 소중했다.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서울에서 내가 말을 걸고 내게 말을 거는 소리는 라디오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라디오 소리가 들렸고, 수업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맞는 것도 라디오 뿐이었다. 어느 날은 이소라의 목소리로 마이클 잭슨의 you are not alone을 들으며 울음을 참기도 했다. 텅빈 방에 울려 퍼지는 라디오 소리는 무언가 말을 거는 느낌이었고 그 느낌으로 시간을 견뎌왔다.

그런 시절도 있다. 아침 6시에 하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듣기 위해 일부러 아침 6시에 일어나기도 했고, 오후에 출근하는 시절에는 여성시대를 챙겨 듣기도 했다. 정선희의 정오의 희망곡을 즐겨 듣던 시절에는, 정희를 들으며 오랜 우울이 괜찮아졌다는 말에 공감하기도 했다. 게시판에 사연을 쓰면 선물을 준다는 말에, 그냥 선물 주세요 했더니 선물이 도착해서 놀라기도 했다. 이소라의 음악도시, 유희열의 음악도시는 밤이면 그냥 흐르는 음악이기도 했다.

그렇게 라디오를 좋아하던 시절이 지나 어느날 문득 생각해보니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왔다. 그것은 이미 다양한 매체가 존재하고, 그 중에서도 유튜브가 주류 매체가 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제 유튜브에서 라디오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진행자의 표정, 게스트의 표정을 확인하며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전에는 라디오 진행자의 모습을 확인하는 일은 보이는 라디오를 진행하는 특별한 날의 특별한 행사였지만, 요즘의 라디오는 대부분 유튜브로 실시간 스트리밍을 하고 있고, 실시간이 아니어도 나중에 전체 방송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라디오일까 유튜브일까. 유튜브로 라디오를 듣고, 유튜브로 음악을 듣고 하는 사이에 나는 종종 라디오가 사고 싶었다. 찾아보면 여전히 많은 라디오 기기를 판매하고 있다. 세련되고 멋진 디자인의 기기도 있고, 다양한 오디오 기능에 라디오도 가능한 기기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라디오만 들을 수 있는 기기를 찾았고, led 화면이 있는 제품이 아니라 다이얼로 조작하는 기기면 좋겠다 싶었다.

스마트폰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왜 라디오를 찾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오래된 추억을 꺼내는 일일 수도 있고, 어떤 피곤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종종 라디오 기기를 검색한다. 그냥 그것이 주는 편안함일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건 라디오 기기를 찾고 있다. 촌스러워도 가장 단순한 스타일로...

2021/08/04 19:24 2021/08/04 19:24
원고 하나 수정하고 있다. 완성한 원고를 넘겼고 편집자님이 교정한 원고를 받아서 수정 요청 사항을 반영하고 있는데... 편집자느님을 연발하고 있다. 분명 내가 수정하고 확인할 때는 문장이 괜찮다고 느꼈는데, 빨간줄이 그인 문장을 보니 많이 꼬여 있다. 심지어 그 꼬인 문장을, 내가 쓰고자 했던 바로 그 의도로 수정 제안을 해주고 계신다. 우와아... 편집자느님, 편집자느님... 정말 고맙습니다. 편집자느님


2021/05/23 17:10 2021/05/23 17:10
수업 시간, 수강생의 토론 중에 저항과 동화를 둘러싼 논쟁이 나왔다. 물론 무조건 저항이 좋다거나 동화는 나쁘다는 식의 논쟁은 아니고 그것의 복잡한 지형을 이야기했다.

같은 수업에서 10대 여성 혹은 청소년 여성을 범죄와 구금을 둘러싼 지형을 다룬 논문을 같이 읽었다. 페미니즘 범죄학 논의에 익숙하다면 특별히 새로운 논의는 아닌데, 여성 수용인의 상당수는 가정폭력 등 폭력 피해 경험이 있고 그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존 전략이 범죄로 구성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 논의와 연결해서, 저항은 언제나 어떤 선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저항은 규범이 수용하는 한도 내에서 발생할 때는 저항으로 인식되지만 그 한도를 넘어서는 순간 범죄가 된다. 다른 말로 저항에 대한 찬양은 가장 규범적인 존재의 호사로운 취향일 위험이 크다. 이 사회가, 지배규범이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저항을 할 때, 이 사회와 지배 규범이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저항을 할 때 저항하는 자는 범죄자가 되거나 죽음에 내몰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올 초 세상을 떠난 이들이 떠올랐다.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고 가장 열심히 세상의 부조리를 폭로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애쓰던 이들은 많이 지쳤고 먼저 좀 쉬겠다며 세상을 떠났다. 저항은 멋진 것이기보다 고통스럽고 위험하고 외로운 것이리라. 나는 저항과 동화주의로 나뉘는 이분법적 사유와 태도를 경멸하고 그것은 삶을, 운동을, 복잡한 마음을 설명할 수 없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저항할 용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나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그림자를, 남겨진 이들의 울음을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요즘 다른 이유로 울음을 참고 있다. 아직은 울 때가 아니라고... 소중한 사람을 위로하며 아직은 울 때가 아니라고... 이러다 울음에 체하지는 않기만 바랄 뿐이다.



2021/05/16 20:53 2021/05/1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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