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나를 라디오키즈라고 고민한다. 이 구절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잘 없지만(사실 뜬금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말은 내 삶의 일부를 잘 포착한다.

물론 나는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가 등장한 이후 이 세상에 출고되었다. MTV의 세대, TV 매체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세상에 출고되었으니 TV 매체에 더 많이 노출되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라디오를 더 많이 들었는데, 마침 어릴 때부터 집에 라디오가 있었고 혈연가족의 다른 이들은 모두 TV를 선호했기에 라디오는 내가 독점할 수 있는 매체이자 기기이기도 했다. 집에 있으면 종일 라디오를 켜두었고, 시험공부를 할 때도, 수험 공부를 할 때도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를 좋아한 이들은 알겠지만 과거에 라디오는 시간에 종속된 매체이자 휘발성이 강한 매체였다. 한 번 흘러간 사연은 다시 나오지 않았고, 이미 지나간 시간을 다시 잡기는 어려웠다. 노래를 듣고 나서야 그 노래가 맘에 들 때, 가수도 제목도 알기 어려웠다. 그러니 언제나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 했고 그것은 늘 실패와 미완성, 혹은 불완전을 동반했다.

그럼에도 나는 라디오를 계속 들었다. 라디오 헤븐. 이문세가 사연을 보낸 청취자를 힐난하는 소리를 들었고, 창원MBC인지 마산MBC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수 하림이 속했던 그룹 벤이 출연해서는 이번에는 꼭 성공하겠다고 춤도 추기로 했다고 다짐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에세이라는 그룹의 안단테라는 곡을 들려준 유희열은 노래 속도가 안단테가 아니라며 불만을 표하는 멘트를 했었다. 물론 다 휘발된 기억이다. 벤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하림은 군대에 갔고 이후 인생은 이미 너무 유명하니... 주파수를 바꿔가며 라디오를 들었던 삶.

서울에서 처음 혼자 살기 시작했던 시절, 라디오는 인테리어의 일부이자 공기의 일부였다. 특정 음악을 들을 때만 제외하면 나는 항상 라디오를 켜두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잠에서 깼고, 나른한 사연을 들으며 오후의 소금처럼 뜨거운 태양을 견뎠고, 늦은 밤이 조금은 덜 쓸쓸하고 덜 우울할 수 있었다. 시선집중이 시작되었을 때는, 라디오를 듣기 위해 일부러 아침 6시에 깨었고 손석희와 김종배의 만담에 낄낄거렸다. 정선희의 목소리가 유쾌했으며(하리수를 향한 친밀한 혐오 농담도 들었고), 양희은의 목소리는 언제나 체제에 가장 순응적이라는 착각을 일으키면서도 틈새를 만드는 방식을 고민하게 했다. 그렇다. 라디오는 시간에 종속되어 있으며 시간은 목소리라는 형태로 흘러갔으며, 목소리처럼 휘발되어 포착되기 어려웠다. 라디오는 휘발되는 소리라는 것이 주는 위로.


SNS를 하지 않는다. 트위터가 한국에서 이제 막 유행하던 시기에 들어갔다가,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기 직전에 탈출했고 구글플러스를 한동안 사용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SNS는 내가 오래 머문 적 없지만 언제나 관심이 많은 매체에 가깝다. 주변에 SNS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이제 SNS는 단체 행사 소식, 사건사고 소식, 논쟁, 현재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논의가 진행되는 곳이기에 SNS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이 세상, 혹은 내가 주로 참여하는 사회와 거리를 두겠다는 태도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늘 SNS를 사용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니 SNS와 관련한 고민은 나의 고민보다는 타인의 고민에서 배우는 것에 더 가까운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내가 만든 세상이었다. 나의 타임라인에 흘러가는 논의는 내가 만든 세상이며, 본계의 경우에는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일 때도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조적으로 타임라인만 보면 녹색당과 정의당이 200석이고 민주당이 좀 있고, 국민의힘은 아예 없거나 거의 없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혐오가 없는 세상이며, 혹은 혐오에 가장 민감하고 예민한 세상이며 그래서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SNS를 자주하는 사람들 중에서 SNS를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또 만나지 못했다. SNS가 유용하다는 말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만, 새로운 정보를 접하기에 유용하고 홍보하기에도 유용하지만... 내가 만든 타임라인의 세상이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인가. 왜 내가 구축한 세상이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아닌가라는 질문은 더 많은 고민을 남긴다.

내가 만든 세상이라는 말은 나의 관심사로만 구축된 세상이라는 뜻인데, 나의 관심사로만 구축된 세상이 과연 좋은 세상일까? SNS는 안 하지만 유튜브는 종일 들으니 관심사로 구축된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 라디오에 나온 한 심리학자가 말해준 내용을 늘 떠올린다. 유튜브 홈 화면에 한두 가지 주제만 나온다면 그 삶을 다시 되돌아봐야 한다고... 관심 주제가 한두 가지로 국한된다면 심리학적으로 건강한 상태는 아니라고. 관심사를 많이 넓히고 새로운 정보, 새로운 의견, 새로운 소식에 자신을 열어 둬야 한다고...


SNS 시대에 라디오 듣기.

이것은 유튜브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매체가 라디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인화된 정보, 개인화된 화면, 개인화된 검색 결과... SNS 시대라는 말의 핵심은 단순히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와 같은 특정 SNS를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것이 개인화되고, 개인의 관심으로만 구축된 세상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그리하여 낯설고 관심 없는 타인의 목소리가 기입될 여지가 없는 세상.

그래서 나는 매일 반드시 라디오를 듣는다. 사실 이것은 선후 관계가 바뀐 표현이다. 나는 라디오를 들었고, 지금은 유튜브로 라디오를 듣는다(하지만 나는 유튜브를 듣는다고 표현하기보다 라디오를 듣는다고 더 많이 표현한다). 한때 라디오는 시간에 종속된 휘발적 매체였기에 동시간대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은 한 가지 뿐이었지만, 유튜브 시대에 다시 듣기를 할 수 있게 변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두 번 오늘의 날씨 정보와 아침 7시 즈음의 교통 정보를 듣는다. 아침 라디오 방송을 두 개 정도는 듣는다는 뜻이다. 처음엔 그냥 내가 좋아하는 매체여서 유튜브로 라디오를 듣지만, 이제는 삶의 중요한 일상이자 정치적 실천으로서 라디오를 듣는다.

공중파 방송은 내가 구축한 세상이 아니며, 청취자와 빈번하게 피드백을 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PD와 작가와 진행자가 조직한 내용으로 구축한 세상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내가 관심이 많은 주제를 들려주기도 하지만(예를 들어, 시선집중은 매주 금요일마다 10.29 참사 유족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어 유족과 고인의 구체적 삶을 배울 수 있다) 내가 결코 찾아듣지 않을 집단의 의견도 들려준다. 그 세상은 내가 관심 있는 주제부터 관심이 없는 주제를 모두 모아 들려주는 세상이며, 나의 핵심 관심사는 드물게 가끔씩 들려주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라디오를 듣는다. 아무리 바빠 오전에 라디오를 들을 수 없다면 잠들기 전에라도 듣는다. 내가 구축하지 않은 세상. 내가 관심이 있는 주제는 구글 뉴스 검색을 통해 일부러 찾는다(구글은 RSS 리더를 다시 살려내라!!!).

유튜브보다 책이 더 낫다는 식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데 이미 지식의 유통 방식이 변한 시대에 유튜브나 SNS의 속도, 유통 방식을 폄하하는 발언은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거부하려는 태도처럼 읽히기도 한다. 물론 지금 이 발언도 위험하다. 그냥 다 활용하면 되는데 이것보다 저것이 더 낫다는 식의 발언에 동의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사실 나는 SNS를 사용하지 않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은 SNS로 구축한 세상보다 더 좁고 좁계 구축된 세상이기도 하다. 사실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나는 라디오를 좋아한다 한 마디 뿐이다. 그 말을 이렇게 뻥튀기할 필요가 있나 싶게 쓰고 있지만, 아무려나 그렇다.


2023/05/03 11:27 2023/05/03 11:27
전체 집합은 그 자신의 완전성 혹은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는 상태인데, 전체 집합의 부분 집합은 무모순 상태일 수 있는가에 대하여...



2023/03/27 22:25 2023/03/27 22:25
01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한 트랜스여성이 결국 등록하지 않겠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뭔가 몸 속에 있던 끈이 하나 뚝,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02
우리는 안다. 그냥 누군가가 싫다고, 특정 집단을 혐오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스스로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인지 (정확하게든 어렴풋하게든) 알 때 자신의 바로 그 수치스러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는 것을. 그냥 싫으면 싫다고, 혐오한다고, 징그럽고 끔찍하다고 말한다면 차라리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는 것이 뭔가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착각할 때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논리라는 것이 지금까지 자신의 혹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치학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묻고 싶다. 도대체 왜 그런 쓸데 없는 고집으로 타인을 죽이려고 하는가를. 그런 논리를 펼치고 누군가를 추방하면 즐겁고 행복한지 묻고 싶다.


03
이번 사건은 공간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이 사건을 가장 간결하게 정리해보자면, 원래 비트랜스여성만 입학할 수 있는 공간에 트랜스여성이 입학해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여성을 문제로 만듦으로써 이 학교에 입학하고 이 학교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성격을 다시 규정한 사태다. 여대니까 당연히 여성만 입학할 수 있다는 말은 심각한 현실 오도다. 여대에는 이미 많은 트랜스젠더퀴어가 다니고 있다. ftm/트랜스남성이 있고,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그리고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mtf/트랜스여성이 다니고 있다. 그러니까 여대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젠더 범주의 존재들이 학교를 다니고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이미 여대를 다니고 있는 많은 트랜스가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있다. 정당하게 합격한 트랜스여성을 추방하는 행동을 통해 현재 여자대학교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구성원의 젠더 범주를 멸균하듯 규정해버렸다. 끔찍한 일이다.


04
하지만 나는 이 사건을 (래디컬)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퀴어 사이의 대립, 혹은 1020 세대 페미니스트와 그보다 나이가 많은 페미니스트 사이의 대립으로 보는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극히 잘못된 방식일 뿐만 아니라 여대와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재생산하는 데 적극 협조할 뿐만 아니라 방조한다. 일부 여대의 지극히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여론을 모으고 결국 트랜스젠더퀴어의 입학을 막았다고 해서 그 랟펨들을 악마화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사건을 사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대립구도를 만들 뿐이다.

여대,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와 트랜스젠더퀴어를 대립시키는 방식의 언설 구조는 결국 이 사회가 어떤 구조적 차별과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는지를 누락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 사태가 랟펨과 트랜스 사이의 문제일 뿐 나머지는 아무런 상관없거나 단순 지지자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발급한다. 다른 말로, 이 사건을 기회 삼아 (트랜스를 단 한 번도 지지한 적 없음에도) 페미니즘은 혐오를 만드는 집단이라며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이 사건의 당사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를 논평자, 재판관으로 만든다. 마치 '나는 중립적으로 이 사건을 평가할 수 있어'라는 바로 그 태도가 지금 이 사태를 만들었다.

이 사건은 이원젠더체제를 만들고 유지하고 이 체제를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공모해서 발생했고 이를 통해 트랜스를 추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극소수의 랟펨을 비난하고 악마화하는 것으로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존의 가부장제 질서, 이원젠더체제, 이성애규범성, 비트랜스규범성, 약자와 소수자를 혐오하는 문화 등은 안전하게 유지될 뿐이다.



05
랟펨에서 나온 트랜스혐오 논리 중 가장 곤혹스러운 표현은 생물학적 여성이다. 트랜스여성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어서 여성이 아니고(남성이고) 여대에 입학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생물학적 여성은 (최소한)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이 등장하면서 가장 많이 문제 삼은 개념이다. 남자는 원래 이렇고 여자는 원래 저래, 남자는 원래 음식을 만들 줄 모르고 여자는 원래 가사 노동을 잘해, 남자는 원래 아이를 못 봐, 여성이라면 당연히 모성이 있는 것 아니냐와 같은 언설이 모두 생물학적 여성/남성을 통해 구성되는 논리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말은, 생물학과는 무관한 말인데, 마치 여성의 운명, 행태, 성격은 염색체에 규정되어 있다는 논리를 정당화한다(XX염색체에 설거지 잘 하는 능력이라도 적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대학에서 생물학을 배우며 염색체에 이런 정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없다). 그리하여 여성이 할 수 있는 일,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연화한다. 동시에 이 말은 성폭력 또한 자연화하는 대표적 언설인데, 남자는 원래 성욕이 많고 못 참는다는 발언이 바로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니까 생물학적 여성과 같은 언설은 페미니즘에서 가장 문제 삼고 있는 개념이며, 페미니즘에서 생물학적 여성과 같은 언설은 그것이 비판받을 때만 이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트랜스를 추방하기 위해, 트랜스를 적대하기 위해 이 논리를 펼치는 모습은 매우 당혹스럽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사건이 트랜스 혐오 사건이 아니라 일부 페미니스트(랟펨)에 의한 여성 혐오 사건으로 설명하고 싶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논리 자체가 여성 혐오다.



06
여성 의제를 우선 다루겠다는데 왜 비난하냐는 말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우선할 수 있는 여성 의제, 보편적 여성이 누구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이것은 모든 여성을 단 하나의 통일된 의견을 가진 집단으로 가정하고 결국 가부장제가 '여성'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바로 그 논리를 반복할 뿐이다.

무엇보다 여성 우선이라는 말은 문재인이 말한 "나중에"와 같은 논리이자 태도다. 트랜스 의제, 퀴어 의제는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로 추방하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07
트랜스를 둘러싸고 나오는 말도 안 되는 논리 중, 불안이 있다. 여성의 불안은 이해한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예의상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정말로 트랜스로 인한 여성의 불안을 이해한다고, 있을 수 있는 불안이라고 말한다. 오래 활동한, 랟펨에 분노하고 트랜스 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여성 공간에 트랜스가 들어오면 불안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 역시, 특강 같은 곳에서 불안을 이야기하면 그럴 수 있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불안을 왜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트랜스로 인해 비트랜스여성이 불안을 겪을 수 있으니 이해해달라는 태도는 마치 동성애자로 인해 이성애자가 불안하니 그 불안을 이해해달라는 말과 같다(목욕탕에 동성애자가 들어오면 이성애자가 불안하고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으니 동성애자는 공중목욕탕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는가?). 예멘 난민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불안해지니 그 불안도 이해해야 하고, 장애인으로 인한 비장애인의 불안과 불편도 이해해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그 누구도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트랜스로 인한 불안에는 이해한다는 말을 하는가?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는 말은 결국 트랜스를 혐오하는 주장이 어떤 점에서는 정당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지금 사태를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공모한 것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제 나는, 저런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 한다.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한다고 말해주기보다 불안과 안전의 권력, 폭력과 배제의 정치를 말해야 한다.


08
중립은 혐오와 폭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행위다.



2020/02/19 20:33 2020/02/1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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