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다녀왔고 청주에는 다녀오지 못했다.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항상 어렵다. 어떤 소식은 뒤늦게 들었다. 어떤 소식은 가짜 뉴스처럼 갑자기 들려와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소식은 지하철을 덜컹거리게 했다. 어느 쪽이건, 암담하기만 할 뿐이다. 어떡하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계속해서 사람들이 떠나간다. 언젠가 불시에 마주칠 수 있는 이별이라면 차라리 불편할 뿐이고 내가 도망치면 된다. 그런데 아무리 다시 만나려고 해도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는 상황은, 황망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집에 기홍씨가 보내준 유과가 있다. 지난 설, 보내준 선물이다. 비건이라고 애써 챙겨준 선물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유과를 못 먹겠다. 그 유과가... 이제는 고인의 선물이자 유품과 비슷한 무언가가 된 유과를 볼 때마다 다른 생각이 나서 먹을 수가 없다. 그의 마지막 흔적 같아 먹을 수가 없다. 그저 집 한 곳에 계속 무거운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살자고 살아가자고 말하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살아남는 게 투쟁이고, 다음을 기약하는 게 불가능한 삶이지만 그래도 살아남자고 말하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살아남으면 더 나은 세상이 온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현상 유지만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살아남으면 좋겠다.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2021/03/07 16:38 2021/03/07 16:38
이론화는 현실에서 떨어진 추상화(과학화? 객관화?)의 작업을 통해 가능하기보다, 구체적인 장면을 이해하고자 하는 집요한 노력과 그 노력의 실패를 통해 구축된다. 구체적인 장을 살펴보는 작업은 지금까지 자명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모순이라서 불가능하다고 인식한 몸과 삶에 모순이라서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는 인식을 만드는 작업이다.

... 일단 메모...


2021/01/10 17:33 2021/01/10 17:33
채식주의자는 왜 성격이 나쁜가가 아니라 채식주의자는 왜 성격이 나빠야만 하는가를 고민한다. 사회적 조건으로 성격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나쁜 존재가 되어야만 비로소 채식주의가 실천가능해지는 사회적 조건을 고민한다.

며칠 전 서울시에서 제작한 웹페이지에서 임신한 여성이 출산하러 가기 전 남편의 반찬과 속옷을 준비해야 하고, 가사노동이 좋은 운동이 된다는 "정보글"이 공유되면서 많은 비판이 일었는데, 일부 논평가는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저런 말을 하느냐고 했다(https://news.v.daum.net/v/20210106123451203). 지금이 어떤 시대냐(물론 나는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모르겠고, 저런 식의 발언이 더 문제라고 고민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사람 앞에서 마초스러움을 자랑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우리'는 안다. 혹은 퀴어라고 밝힌 사람 앞에서 퀴어도 인정한다고 뿌듯한 표정으로 말하며 이성애 연애를 자랑하거나 그런데 언제부터 퀴어라고 생각했느냐는 식의 질문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지를 또한 '우리'는 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그러느냐'라는 말로 상대방을 비판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럼 채식주의자 앞에서 고기를 먹거나 어제 먹은 고기 음식(반드시 덩어리 고기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떨까? 이것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라는 말에 해당할까? 오히려 '우리는 채식주의자도 배려한다'며 특별한 자랑스러움을 표현하는 반응을 더 빈번하게 접할 때, 나는 왜 채식주의자는 성격이 나쁜 존재여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유독 채식주의자 앞에서는 자신도 채소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기분이 이상해질 때, 채식주의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고민한다. 왜, 언제부터 채식을 하기 시작했느냐고 마치 당연히 물을 수 있는 것이라는 듯 물을 때, 그것이 어떤 심문처럼 작동할 때, 채식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페미니스트 앞에서, 퀴어 앞에서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윤리가 있다면 왜 이 윤리는 채식주의 논의 앞에서 멈추고 작동하지 않는가. 왜 채식은 끊임없이 기호의 문제로, 선호하는 음식 취향의 문제로 수렴되며 그 정치학은 계속 박탈되는가. 혹은 특별히 배려해주는 문제 정도로 인지되고 정확하게 이런 이유로 퀴어/페미니즘의 장에서도 짜증나고 귀찮은 문제로 취급되는가.

채식주의자의 성격이 나쁠 때에만 비로소 채식주의가 취향이나 번잡한 일이 아닌 정치학으로 작동할 때, 채식주의자는 성격이 나빠야만 비로소 채식주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고민을 한다.

+너무 두서없이 적었나... 일단은 메모만...


2021/01/10 16:51 2021/01/1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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