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대답]을 읽고 소통(疏通)의 '疏'에 '멀어지다'는 뜻이 있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의미도 "침묵을 나누다"가 아닐까. 학제 간 소통은 물론, 자신과의 대화도 결국은 소통 대상과 멀어지는 일이다. 거리와 차이에 대한 인식만이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므로 서운한 일도 아니다. 어떤 학문 분야에서나 모든 이론은 매순간 운동하는 세계를 영원으로 고정시키려는 욕망 행위다. 이론은 인식자와 대상, 언어가 우연히 단 한 번 만난 결과일 뿐이다. 대상을 관찰하는 그 순간에도 현실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실성에 대한 추구는 소통의 가장 큰 장애물일 뿐만 아니라 지성의 독이다.


성차는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성차는 수 천 년 동안 젠더화된 각종 제도와 실천, 법, 노동, 언어, 무의식, 섹슈얼리티 등이 상호작용하면서 체현된 인간-몸social body의 일부이다.


논쟁은 논쟁할 가치가 있는 의제에 한해서 논쟁적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여성주의가 논하는 것은 남성과 같아지는 '평등'이라기보다는, 인간 몸의 차이의 해석을 둘러싼 권력 관계와 젠더라는 사회적 분석 범주가 구성되는 경계의 정치학에 관한 것이다.


혹시 타자는 동등한 인식자가 아니라 데이터로만 간주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주체는 그것을 기반으로 기존 이론을 해체하기보다 풍부하게adding 하는 데 혹은 자신을 성찰, 각성시키는 데 타자의 경험을 동원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본성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다. 체현embodiment, 훈육, 행위성, 수행성performance, 사회적 몸mindful body 등의 후기 구조주의 개념들은, 이러한 이분법을 넘어서서 사회구조와 인간의 변화 혹은 불변의 관계성을 동시에 설명하며, 이러한 인식틀에서 인간 본성 유무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간단히 말해, 인간 본성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선재적인 것이 아니라 늘 생성되는 과정에 있다.


농사는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환경을 통제하는 것으로(p.57), 농업의 발달은 인구 증가와 생태계 파괴의 악순환을 가져왔다. 게다가 농업은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는 경제 체제다.


원래 사실과 가치는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事實)은 언제나 사실(史實)의 산물이다. 사실의 발견은 인식자가 관계 맺고 있는 사회의 특정한 가치 체계로부터 나온다.


몸은 사회적 기억re-member이다.


-정희진, "몸은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 [문학과 사회] 2007년 여름, 통권 78호, p.444-449


며칠 전, 오랜 만에 숨책에 갔다가, [문학과 사회]란 잡지에 정희진선생님 글이 실렸단 얘길 들었다. 이 소식을 전해준 "숨"은, 선생님의 첫 번째 문장을 읽고 책을 덮었다는 말을, 이유는 묻지 말라는 말과 함께 했다. 알 것 같다.


혼자 읽기가 너무 아까워서, 처음으로 스캔도 했다.


+어제 씨네21을 사려다가 더 이상 선생님이 글을 쓰지 않는다는 슬픈 소식을 접했다.


+이 책의 한 권을 읽어야 겠다. 채식주의와 관련 있어서.
2007/07/24 18:06 2007/07/2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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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25 14: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멋쟁이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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