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선잠을 자고 있었다. 잠들었지만 깨어있는 상태. 깨어있는지 잠들었는지 모르는 상태. 잠들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주변의 상황이 느껴지는 상태. 그런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귀에선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가끔 가수상태에서 상상하는 상황이 귀에서 고스란히 들리곤 한다. 차를 떠올리면 차 소리가 나는 식이다.) 그러다, 4칸 씩 두 줄로 쌓아 둔 책이 무너졌다.


며칠 전부터 위태로웠다. 상당히 기울어진 상태로 가끔씩 제일 위에 올려둔 책이 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것을 건드릴 엄두가 안 났다. 건드리다니. 한 번 손대면 천 권에 가까운 책을 수습해야 하기에 그냥 방치하고 있었다. 아무 문제없다는 자기 암시. 끊임없는 암시를 통해 외면하고 있었다. 책장을 살까 했지만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소비가 생겨서 살 형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새벽에 책이 무너졌다.


깜짝 놀랐다. 그러며 지금은 12시구나 했다. 12시…라고? 12시 즈음에 잠들었는데, 그렇게 잠이든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고 몸은 기억하는데 12시라니. 그럼 새벽 2시였을까. 이런 혼란 속에서 다시 잠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정리하는 건 가혹한 일이라고 느꼈으니까. 아는 사람은 아는 금기사항 중 하나는 루인은 밤 12시부터 아침 6시 사이에 문자나 전화하는 걸 무진장 싫어한다는 것. 그땐 잠자는 시간이고(실제 잠들어 있고 아니고는 상관없다) 그 시간에 깨어나는 걸 싫어하고(소리에 예민하다, 그래서 컴퓨터를 커두고 잠들면 하드 소리에 잠을 설친다) 한 번 잠에서 깨면 다시 잠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책이 무너지는 엄청난 소리에 잠에서 깼지만 그냥 다시 잠들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정리하지, 뭐. 하는 몸으로.


책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 뭔가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억압되어 있던 일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 방 안 가득하던 갑갑하고 억눌리던 분위기가 깨진 느낌. 그 때문에 최근 피곤했던 걸까.


아침, 책을 정리하려니 귀차니즘이 밀려왔다. 하지만 책을 정리하지 않으면 방문을 열 수 없는 상황! ㅠ_ㅠ 문 옆에 책을 쌓아두었기 때문이다. 정리를 하며 당장 볼 책이 아니다 싶으면 제목은 안 보이더라도, 제목이 보이는 방식과 제목이 안 보이는 방식으로 해서 교차로 쌓아 올렸다. 헌책을 여러 권 쌓아 올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목이 보이도록 쌓으면 앞으로 기울어져서 쉽게 무너진다.


책장을 사야할까 보다. ps는 루인이 좀 넓은 집으로 이사하거나 집을 사면 벽에 맞는 책장을 직접 짜서 선물해준다고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평생 보증금과 월세로 살겠다고 현재는 다짐하고 있는 상태. 그러면서도 욕심은 많아 책이나 CD는 왜 그렇게도 사는 건지.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길 바라면서도 그럴 수 없는 무거움들로 족쇄를 채우고 있다. 살아간다는 건, 발에 족쇄를 채우는 일일까.


날이 흐리다. 당신이 떠오르진 않지만 몸은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무엇을? 그리고 책 속에 쌓여있던 먼지들이 몸으로 들어왔다. 먼지들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어떤 괴물이 될까, 궁금해진다. 왜… 뜬금없이 R.O.D.가 떠오르는 걸까? -_-;;;
2006/06/27 10:03 2006/06/27 10:03
Trackback URL : http://runtoruin.com/trackback/460
  1. qcin  2006/06/28 2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R.O.D가 떠올랐어요.
    • 루인  2006/06/30 16:2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쵸? 헤헤. 어느 날 갑자기 루인이 괴물이 되어서 자기 책을 모두 삼켜버리는 망상을 했더래요. 흐으-_-;;;
  2. 수인  2006/06/29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밤늦게 전화하는거 굉장히 안 좋아하는데 루인님도 역시.. 흐흐~ '살려달라'같은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늦은 시간에 왜 전화질인가 싶은.. -_-; 그래도 연인 사이엔 예외가 될까요? 뭐 그것도 잠시 몇 달간만 유효하겠지만. 크크~ 책을 어떻게 쌓는 걸까요? 잘 상상이 안돼요. 세로로 했다가 그 위로 가로로 했다가 뭐 그런건가요? 흐흐~ 그랬다간 빼기 힘들 듯.. ㅋㅋ 이 방법은 아닌 듯 싶구요. 책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오래전에 책 전달한다는 글 올리셨을 때 받고 싶었지만 한 번도 글을 안 남겼는데 하는 뻘줌한 생각에.. 크크~ 그래도 괜찮다고 하신 듯 하나.. ㅎㅎ 소유하신 책이 천권이나 되다니~~! 부럽사와요. 한때 책을 많이 읽던 시기에는 큰 방 하나를 모두 책으로만 도배를 하고 싶던 적이 있었더랬죠. 뭐 다른 작은 공간은 오디오 공간으로.. 크크~ 둘 다 물 건너간듯 하지만. -_-;
    • 루인  2006/06/30 16: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루인은 까칠한 성격 덕분에-_-;;; 연애를 시작한지 얼마 안 지난 애인이라도 그 시간의 전화나 문자는 싫어할 것 같아요. 크크크;;;;
      책을 가로로(눕혀서) 쌓는 거 맞아요. 그리하여 뒤쪽에 쌓이거나 아래쪽에 쌓이면 꺼내길 포기하는 셈이죠. 흐흐. 덕분에 뻔히 있는 책인데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한다죠-_-;;;
      책 신청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럴 날이 있을 거에요.^^
  3. 수인  2006/06/29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R.O.D 가 뭔가요?? 그룹 이름인가요? ㅋ ^^;
    • 루인  2006/06/30 1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R.O.D.는 Read Or Die의 첫 글자만 모은 건데, 일본 만화예요. 책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을 쟁탈하거나 그것을 지키거나 하는 내용인데, 루인은 책 먼지를 마시고 루인이 괴물이 되는 상상을 했더래요. 실제 그런 괴물도 나오거든요. 흐흐;;;;;;;;;;;;
open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