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이곳에 쓴 글들을 토대로 수업 에세이를 위해 재구성하고 다시 쓰고 해서 완성한 글. 이미 이랑엔 공개했음. 어정쩡하게 길다는 느낌이 든다. 수업논문이지만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루인은 이런 식이 좋다.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언어
―서울여성영화제 상영작인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 [침묵에 대한 의문], [커밍아웃]을 읽고


1.
새 학기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났을까, 등록금인상과 관련한 총학의 대자보와 현수막을 접했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 등록금 및 입학금 때문에 포기할까를 고민했었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총학생 회장을 비롯한 몇 명이 단식을 시작했다는 자보를 접하고 아픔을 느꼈다. 결국 이렇게 가는 걸까.


단식을 한다는 대자보를 접한 며칠 후, 이른바 “대학생들을 위한”다는 매체에서 관련 기사를 실었다(정확한 매체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학기 초만 해도 ‘평화’롭고 즐겁게 가더니 결국 단식이나 삭발 등 “과격”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투쟁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접하고 불편함을 느꼈다. “과격”하다고? 이 매체는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를 위해 기사를 쓰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대학생을 위한” 매체란 표제아래 총장으로 상징하는 학교의 입장을 반영하는 매체는 아닌가, 했다. 누구의 입장에서 “과격”하고 “극단”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모든 저항은, 기득권자와 그 기득권이 “다수”의 권력/권리이며 사회를 안정하게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과격”하다. 모든 저항은 “과격”할 수밖에 없다.


일전에 상대방의 ‘폭력’에 기분이 나빴지만 며칠이 지나서야 불쾌함을 블로그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했던 적이 있다. 어떻게 되었을까. 루인이 사과했다. 상대방은 기분이 나쁘면 진즉에 자신에게만 조용히 말하지 왜 블로그와 같은 “공론”의 장에서 떠드느냐고,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고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기분 더러웠지만 결국 루인이 사과했다.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자신의 목소리를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해 어떤 전략/언어를 쓸 것인가)와 함께 누구에게 문제제기 할 것인가(누구와 소통할 것인가, 침묵의 의미는 무엇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 피해경험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순간, 가해자는 “명예훼손”이니 “인권침해”니 하며 역고소를 한다면서 자신이 피해자라고 호들갑을 떤다. 당연한 발화가, 피해경험자를 가해자로 역전하는 일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권력의 불균형 상황에서 기득권자에게 도전하는 저항자의 모든 행위는 “과격”하기 마련이며 알아듣지도 못할(않을) 사람에게 항의/저항하는 건 언제든 피해경험자, 저항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킨다(“넌 왜 그렇게 과격하니?”,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하지만 기존의 언어 내에서 기득권자와 주류 이데올로기를 위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하기는 불가능하다. “왜 그렇게 쿨하지 못하냐”, “왜 그렇게 감정적으로 말 하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라”와 같은 언설들 속에서, 기존의 언어로 저항하기란 결국 기득권자의 “배려”와 “관용”을 ‘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저항자, 피해경험자들이 가지는 ‘죄책감’(“좀더 ‘평화’롭게 할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과격한 걸까”, “상대방이 기분 나쁘면 어쩌지”)은 기득권자, 가해자들의 권력/위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데서 생기는 감정이다. “넌 왜 그렇게 과격하냐”란 비난은 기득권자, 가해자들의 권력과시/투정에 가깝기에 반응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느낀다.




2. “과격”하고 “극단”적인 표현…? 누구의 입장에서?
리나 마크보울 감독의 영화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Leila Khaled Hijacker]를 읽으며, 감독은, 기존의 언어는 누구의 입장을 반영하는가, 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느꼈다.


계속읽기..

2006/04/30 22:57 2006/04/30 22:57
Trackback URL : http://runtoruin.com/trackback/401
open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