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세대에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감동적이고 또 재미있는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 경험이기도 한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 TV에서 이 영화를 가족과 함께 본 기억이 있다. 이 영화를 방영하던 날 동네 사람들 모두 시간을 수차례 확인하며 설레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어머니는 감동을 받았고 이 영화가 정말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를 몇 년이 지나서도 되풀이 했다.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년)를 원작으로 삼은 이 영화는 주인공을 맡은 배우 비비안 리의 후광과 함께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소중한 추억, 즐거움, 재미, 감동이라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소설은 영문학사의 맥락에서도 매우 중요한 텍스트로 평가되고 있으며 당시 풀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면 반드시 상위권에 꼽히곤 했다.

이 소설이 처음 출판된 지 대략 90년 정도가 지난 최근, 출판사 팬맥밀란은 책 표지에 경고 문구를 추가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우리 역사의 충격적인 시대, 노예제를 낭만화하는 등 문제적 요소를 포함하는 소설”이라는 문장이 그것이다(출처). 이 소설은 미국 남북 전쟁 시대에 흑인 노예제를 자연 질서, 신의 섭리로 인식하던 시절의 감수성을 일정 정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인종주의가 생산한 유모(mammy?)와 고용주 혹은 구매자 사이의 관계를 따뜻한 애정과 보살핌으로 포장하고 있다. 물론 개별 관계에서 유모와 백인 구매자의 가족 사이에 애정과 친밀감이 존재하는 관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에게 따뜻하고 애정어린 보살핌의 기억일까? 누구에게 아름다운 옛시절일까?

비슷한 예시는 차고 넘친다. 예를 들어 나는 어릴 때,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매우 좋아해서, 과정을 보태지 않고도 최소한 100번은 읽었다. 빨간 표지의 하드커버, 그 유명한 계몽사의 세계문학전집 판본으로 읽었는데, 당시 유난히 좋아한 소설 중에서도 『로빈슨 크루소』는 단연 최고였다. 그렇기에 중학생이던 시절, 나는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의 완역판을 발견하고는 너무도 기뻐,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긁어모아 구입했다. 예상 가능하겠지만, 나는 그 책을 다 못 읽었다. 아마 그때 이후로 나는 그 책을 지금까지도 다시 못 읽고 있다. 문학사의 맥락에서 디포의 이 소설은 근대 문학 혹은 소설 문학의 성립, 근대적 개인의 구성, 개별적 주체의 생산 등 나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니 긍정적인 면이 일정 부분 존재하는 소설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완역판은 근대적 개인의 모험과 탐험 그리고 역경을 이기는 주체의 모습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았다. 어린이용으로 각색한 서사에 존재한 모험과 탐험의 내용은 그대로이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미개인’과 ‘야만인’에 대한 혐오와 멸시, 차별로 가득했다. 디포가 소설을 쓰던 시절은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절이며 흑인은 기독교적 신앙이 없고 식인을 하는 야만인, 미개인이니 죽여 마땅한 존재이자, 그들을 죽이는 것이 신의 섭리로 정당화되던 시대였다. 디포의 소설은 정확하게 그러한 인식을 근거로 구성되었고, 로빈슨은 인종차별주의자, 살인자, 학살자였다. 다른 말로 어린이용 책에는 빠진 크루소의 모험과 탐험은 침략과 약탈, 그리고 인종차별의 여정이었다.

어린 시절의 익숙하고 행복한 공상을 가능하게 했던 서사에는 이런 차별과 폭력이 가득하다. 콩쥐팥쥐는 재혼한 여성에 대한 혐오를 확대재생산하며, 혈연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공동체라는 규범을 자연화한다. 신데델라나 백설공주 같은 이야기는 이성애-가부장제 서사를 유일하게 가치 있는 낭만적 사랑 이야기로 치환하며, 여성이 경험하는 억압은 오직 괜찮은 남성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규범을 재생산한다. 그래서 제2 물결 페미니즘 운동과 이론화 작업이 활발해 졌을 때, 많은 페미니스트 문학 비평가는 동화나 고전에 내재한 인종차별, 성차별, 백인중심주의, 화이트워싱의 낭만화, 퀴어와 장애인의 악마화 및 범죄화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비판은 이론적 작업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존의 동화를 다시 쓰는 작업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동화를 만드는 방향으로도 전개되었다. 요즘 들어 자주 만날 수 있는 성평등 감수성을 가진 동화, 다양성을 긍정하는 감수성을 담은 동화는 모두 그 시절 페미니스트의 치열한 노력의 성과다. 쉽게 예상할 수 있겠지만, 그 시절 퀴어/페미니스트의 다시 쓰기, 다시 읽기 작업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고전은 고전으로 인정해라’, ‘동화를 왜 문제 삼느냐’, ‘어린이를 도구화한다’, ‘교조적이다’, ‘어린이에게 페미니즘과 퀴어를 주입하는 폭력이다’와 같은 말은 이미 그 시절에도 팽배했던 비난의 언어다. 하지만 퀴어/페미니스트의 노력은 지금의 새로운 서사를 가능하게 했다. 지금의 새로운 감수성은 최근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따른 변화의 영향도 있지만, 제2 물결 페미니즘이 등장한 후 50년에 걸친 노력이 만든 효과이기도 하다.

자,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변주해보자. 취향이나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은 정치에 선행해서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영화 《인어공주》(2023)를 둘러싼 반응을 살피며 촉발되었다.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흑인이라서 안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원하는 주인공 이미지가 아니라서 안 보는 게 맞는 거다.”(이 글에 달린 댓글). 이 문장은 인종 차별을 정치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 소중한 추억의 문제로 치환한다. 취향이나 추억이 정치와 무관한 영역이라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인종주의와 관련한 경고가 붙을 이유가 없다. ‘나’의 비비안 리가 인종차별주의자일리가 없고, 라푼젤이 용맹할 이유가 없으며, 신데렐라가 스스로의 성취를 만드는 이야기가 나올 수 없다. 흑인은 영원히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유모로 남아야 하고, 라푼젤은 왕자가 구조해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어공주 에리얼은 백인이며 붉은색 머리 색깔을 가진 존재여야만 한다는 상상력 혹은 추억 보정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흑인이어서 싫은 것이 아니라 어릴 때 봤던 에리얼의 이미지에 부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추억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그 추억은 반드시 아름답고 유지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할 이야기로 예시를 경유해보자. 1932년 용산에서 태어난 후루사토씨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즐겁게 놀며 행복한 시절을 보냈지만, 1945년 8월 부모님과 함께 세간을 남겨둔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후루사토씨는 자신의 생애가 역사의 격량에 휩쓸린 피해자라고 느끼며 용산에서 살던 시절이 그립다. 이것은 조선일보가 2023년 5월에 칼럼 형식으로 게재한 글의 일부다. 식민지 침략국가 국민의 기억 속 한국은 행복하고 즐거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피식민 상태로 살았던 그 시절의 한국인 혹은 조선인도 그렇게 느꼈을까? 물론 개개인은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으며, 개인이 국가의 모든 잘못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은 부당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논리는 왜 독일이 지금도 나치 전범과 대학살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독일이 유난히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집단으로 추방한다. 국가의 잘못에 국가 구성원인 국민 혹은 개인의 책임을 면제하는 태도는 결국 누구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사태를 만든다. 예를 들어 제주 4.3 사건은 이승만 때 발생한 사건일 뿐 현재 정부가 왜 사과해야 하며, 전두환의 학살은 왜 현 정치권이 정치적 책임을 논하는가? 이것은 모두 지나간 과거에 대한 과도한 정치 공방인가? 역사적 차별과 폭력은 단순히 추상적 국가나 당시의 국가 대표가 져야 할 책임이 아니라 반복해서 고민하고 감당해야 할 책임이며, 그런 국가 체제를 지지하거나 승인하거나 방기했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그러니 후루사토씨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식민지 침략 시절을 아름다운 옛시절, 추억의 아름다운 공간으로 기억하는 행위는 모든 국가 폭력, 침략, 폭거, 약탈을 논의할 수 없게 만든다. 로빈슨 크루소의 학살과 약탈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되고, 스칼렛 오하라와 마미의 관계는 그저 아름답고 소중한 관계가 될 뿐이다. 이것이 추억과 취향의 정치학이다.

인어공주 에리얼이 흑인이어서 무서웠다, 레개 머리여서 공포였다는 식의 언설을 공공연히 마혀, 어린 시절 추억 속의 (붉은 머리 백인) 인어공주를 돌려달라는 말은 식민지 침략 시절이 아름다웠다는 말과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무엇보다 《인어공주》의 애니메이션(1989년)과 TV판(1992-1994)이 나오던 시절은 인종차별이 공공연했으며 대중 매체에서 흑인 캐릭터는 조연인 경우가 더 많았다. 흑인 감독이 1990년대 들어 흑인을 주인공 삼아, 괜찮은 캐릭터를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이들 감독 대부분이 두 번째 영화를 제작하는데 실패했다. 당혹스럽겠지만 흑인시네마의 르네상스는 2010년대 후반으로 명명할 정도로 대중 매체에서 흑인 주인공의 등장은 드물고, 인기를 끌기 어려웠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최초의 흑인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작품은 무려 2009년 티아나(《공주와 개구리》)였다. 이 말은 초기 인어공주 에리얼이 붉은 머리 백인인 것은 인종이나 어종의 맥락에서 백인어야 해서가 아니다. 그 작품을 생산하던 시기의 인종차별과 백인중심주의가 만든 효과다. 즉 백인 에리얼은 아름다운 과거가 아니라 인종차별, 성차별, 이성애규범성, 장애혐오가 중첩된 지점에서 생산된 캐릭터일 뿐이다. 이것을 그저 기억 속의 소중한 캐릭터로 치환하는 행위는 폭력과 차별을 재생산하는데 동조할 위험을 내포한다.

《인어공주》를 둘러싼 논쟁은 그 작품 하나만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고 디즈니의 최근 작업 혹은 마블의 최근 작업에 대한 비난과 얽혀 있기도 하다. 최근 마블 영화가 재미 없는 이유가 PC(정치적 올바름)가 묻어서라는 식의 반응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그 평가의 정당성과 별개로, PC가 묻어서 재미가 없다는 말은 차별과 혐오가 기본값으로 존재해야 재미있다는 뜻인가? 여성은 수동적이고, 악당은 흑인이어야 하며, 아시안은 무능하거나 눈이 찢어진 모습이어야 재미있다는 뜻인가? 백인 남성이 흑인과 아시안과 장애인 등을 대량 학살하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뜻인가? PC가 묻어서 재미가 없다는 말은, 사실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며, 충격적인 발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마블 영화는 PC가 묻어서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제대로 사유하고 고민할 줄 모르는 제작자가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에 서사는 못 입히면서 PC나 다양성으로 포장하려 들어서 재미가 없는 것이다. 기획자나 제작자가 아이언맨 혹은 토니 스타크에게는 서사를 부여할 수 있는 상상력(혹은 공감)이 있지만, 캡틴 마블이나 다른 여러 새로운 캐릭터에게는 제대로 된 서사를 부여할 상상력이 부재함에도 본인들이 작품을 제대로 제작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지금의 재미없는 마블 영화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PC가 묻어 재미가 없다면, 이제 아시안 혹은 한국인을 향한 혐오도 용인하고 백인이 아닌 인종이 사는 세상은 언제나 위험하고 열악한 방식으로 묘사해도 용인할 수 있는가? 이런 모든 문제제기는 PC의 효과들인데 왜 어떤 PC는 가치 있는 진전이자 변화이며, 어떤 PC는 작품을 망치는 최악으로 인식되는가?

추억과 취향은 언제나 가장 정치적인 의제이며, 사회적 편견, 차별, 구조적 억압이 중첩된 방식으로 구성된다. 좋았던 옛시절은 문동은의 서술인지, 박연진의 서술인지 섬세하고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50H50 칼럼🍯)



2023/06/08 12:19 2023/06/08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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