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 남자아이가 버려진 스타킹을 주워 잘 뭉쳤다. 풀숲 옆에 두니 뱀처럼 보이기도 했다. 풀숲에 숨어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고 마침 한 여성이 걸어왔다. 스타킹을 끌었고 여성은 뱀이 지나가는 줄 알고 놀라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꼬마는 도망갔지만 결국은 걸렸다. 기절한 여성은 임신 중이었고 꼬마의 장난으로 유산할 뻔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한 부분이다(구체적 내용은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제제는 순결한 피해자("나의 제제는 순결하다능, 그런 애가 아니라능")가 아니다. 내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제제를 순결한, 순수한 피해자로 조직하지 않고 악동이며 욕망이 있는 모습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죽지 않을 만큼 폭력 피해를 당하지만 그럼에도 제제는 '피해자다움'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E가 아이유의 신보 앨범에 실린 '제제'란 곡과 '스물셋'이란 곡의 뮤직비디오가 논란이라고 알려줬다. 할 이야기가 많은 사건이다. 아이유를 비난하는 근거가 제제를 순결한 피해자, 피해자다움에 맞춘 모습으로만 그려내는 태도란 점이 더 큰 문제라고 고민한다.

E와도 이야기를 했지만 궁금한 점도 있다. 아이유가 '소아성애컨셉'이란 걸 사용해서 문제인 건지, 제제를 재해석해서(=건드려서) 그런 건지 진심 궁금하다. 왜냐면 한국의 많은 여자아이돌, 걸그룹은 흔히 말하는 삼촌팬을 중요 타겟 집단 중 하나로 삼는다. 삼촌팬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이 십대 아이돌을 소비한다. 이제까지 삼촌팬의 행태, 삼촌팬의 공공연한 욕망은 (이와 같은 수준으로)비난하지 않다가, 아니 십대 아이돌의 섹시함=청순함을 적극 소비하다가 이제 와서 왜 갑자기 아이유를 비난하는 것일까? 아이돌이 20대만 되어도 늙었다고 말하면서 갑자기 왜? 참고로 소아성애라는 용어는 소아와 청소년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아울러 아이유의 뮤비 내용과 롤리타를 비교하는 글을 봤는데, 내 감상은 간단했다. '제가 호흡하는 방식이 연쇄살인범의 그것과 비슷해서 죄송합니다.' 참조점을 어디서 찾으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는 내용을 롤리타 혹은 소아성애로 독해하기 위해 갖다 붙인다는 인상이다.

이런저런 건 더 정교하게 써야 하는 내용이지만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덧붙이자면.

이 사건의 핵심은 '내가 아이유 널 소아로 성애할 수는 있지만 네가 감히 제제로 성애를 하다니'로 독해되었다. 여성 아이돌, 혹은 '어린' 여성 작가는 창조성을 어디까지 표출할 수 있을까? 노래를 잘 하면 정말 훌륭한 여자아이돌이다. 작사를 하면 더 대단하다. 작곡도 할 수 있으면 진짜 대단하다. ('나의 아이돌 진짜 대단하다, 최고다!') 하지만 세상을 혹은 명작을 직접 재해석하기 시작하면 그것도 에로틱과 섹슈얼리티를 교차하며 재해석하면 그땐 마녀가 된다. 여성 아이돌이 창조자로 등장할 때도 우쭈쭈해줄 수 있는 수준의 창조자로 등장해야지 세계를 완전 재해석하는 주체로 등장하는 순간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 사건을 더 살펴야겠지만 이런 인상이 매우 강하다.

누가 이와 관련해서 속이 시원한 글을 써주면 좋겠다.

2015/11/07 14:30 2015/11/07 14:30
Trackback URL : http://runtoruin.com/trackback/3110
  1. 해슬  2015/11/08 18: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아이유 널 소아로 성애할 수는 있지만 네가 감히 제제로 성애를 하다니' 공감해요.
    갑작스레 아이유한테 몰아치는 이 모든 비난이 좀 소름끼쳐요. 그렇게들 사랑하던 아이유가 아니었나..
    저는 갑작스런 이 비난들이 아이유에 대한 질투나 박탈감(특히 '멀끔하고 잘나가는 남자친구'와 사귄다는 것이 공개된 이후)에서 비롯된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루인님의 관점도 동의하게 되네요.

    http://www.huffingtonpost.kr/sehoi-park/story_b_8485696.html
    어제 읽은 기사인데, '아이유가 롤리타라고 한들 롤리타에게 무슨 흠이 있느냐'라는 논조의 글이에요. <<롤리타>>에 대한 엄정한 해석글은 아니라서 돌로레스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닐수도 있다는 해석까지는 나아가지 않지만, 혹 관심있으시면 읽어보시길..!

    아 그리고, 혹시 루인님의 이 게시글 제 블로그에 퍼가도 될까요?
    • 루인  2015/11/11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공감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질투나 박탈감으로 접근하는 건 아예 아이유를 무시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힘들달까요... 장기하에 종속된, 혹은 어떤 애인에게 종속된 존재로 아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니까요.

      전문 퍼가는 건 좀 그렇고 링크는 어떨까요? 그럼에도 퍼가시거나 링크를 소개한다면 해슬님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셨으면 하고요...
  2. 해슬  2015/11/20 2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 제 의도는 '많은 사람들이 여성을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장기하와 사귀는 아이유를 더 질투하게 된건 아닐까'였는데, 저도 어쩌면 큰 문제의식 없이 그렇게 생각해버린걸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아이유의 스물셋을 듣고 제가 느낀 질투심이 그런거였거든요. 그 사람의 매력과 재능을 질투하는 동시에 아이유가 그런 남자친구를 가졌다는 것에 큰 질투를 느꼈었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제 자신이 참 우습고 어글리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안에도 분명히 그런 안좋은 생각이 있는거겠죠!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 거라는..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로그에 퍼가지는 않을게요. 루인님글에 공감한다고 댓글 달았었지만 사실 공감이라기 보다는 완전한 동의였었고,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느꼈었어요.
    • 루인  2015/11/28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시 읽으니 제가 너무 날카롭게 말했나 싶어 죄송합니다. 좀 다르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요... 과한 혹은 부당한 말일 수도 있는데 너그럽게 받아주셔서 도리어 제가 고맙습니다!
open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