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을 바꾸기 위해 머리 스타일, 옷 입는 방식 등을 활용하면서 '여성'으로 통하는 경우가 늘었다. 물론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에겐 별로 안 그렇지만, 낯선 사람의 경우 대략 반반인 듯하다. "쟤 뭐야?"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경우도 많다. 동시에 사무실에서 택배를 대리 수령할 때면 "생년월일 쓰고 숫자 2 누르세요"라는 말을 듣는다. 주민등록번호가 지칭하는 바로 그 2다. 이런 변화를 경험하면서 처음엔 재밌었지만 지금은 재미가 없다.

수염을 길러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수염이 잘 나는 편이다. 수염은 타인을 '남성'으로 인식하는 주요 단서기도 하다. 물론 수염을 기르는 것도 일이고 관리하는 건 더 큰 일이라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그래도 수염을 길러볼까 했다.

관두기로 했다. 진부해서. 이른바 젠더퀴어 이미지라고 하면 많은 경우 여성스러운 화장과 복장에 수염을 기르는 모습으로 젠더를 재현한다. 전형적 이원젠더 코드를 활용하는 방식인데 지금으로선 진부하다. 물론 일상에서 이렇게 한다면 많은 사람이 당황할 것이다. 지하철이나 음식점에서 많은 욕설을 들을 가능성이 크다. (상황에 따라 욕설로 그치면 다행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진부하다.

무엇보다 나는 화장도 하지 않고 스키니진을 입는 것을 빼면 아주 여성스럽다고 여기는 복장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수염을 기르면 그냥 조금 여성스러운 남자로 독해될 뿐이다.

다른 젠더 표현 전략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다양한 젠더 표현 전략을 선택하거나 체화하며 수행하는데 나에게 맞는 뭔가 다른 젠더 표현 전략이 필요하다.


2015/10/11 20:31 2015/10/1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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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10/13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루인  2015/10/14 1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ㅠㅠㅠ

      사실 진부함에서 어떤 다른 가능성을 뽑아내는 게 힘이고 감각인데 저에겐 그런 감각이 없어서요... ;ㅅ; 영원히 진부하게 살지 않을까 해요 ㅠㅠ

      일단,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자궁, 난소, 고환에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말과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란 건 아실 거예요.
      생물학적으로 어떤 기능을 한다는 것과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다른 것처럼요. 긴생머리가 여성의 것일 땐 여성스러움의 상징으로 인식되지만 락커의 것일 땐 남성성의 상징으로 인식되듯이요.

      만약 본질적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호르몬? 염색체? 뇌? 이런 식의 설명은 근육질 게이와 여성스러운 게이, 부치와 펨,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퀴어 등을 전혀 설명할 수 없죠. 유명한 인류학 연구 중에 마가렛 미드의 세 부족 연구가 있는데요. 성차는 본질적이기에 남성은 생계부양을 하며 힘이 강하고, 여성은 가사노동을 하고 힘이 약하다는 식으로 말하잖아요. 그런데 미드가 조사해보니 어떤 부족은 남성-생계부양자, 여성-가사노동자 역할을 하는데 다른 부족은 여성이 생계부양자에 힘이 센 노동을, 남성이 가사노동을 한다는 점을 확인했죠. 얼추 100년 전에 나온 연구고요.

      한국에도 번역된 책이 많은 페미니스트 벨 훅스는 또 다른 중요한 지적을 했는데요. 보통 남성은 힘이 세서 농장 일을 잘 하고 여성은 집안에서 가사노동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요. 아프리카에선 여성이 농장 노동과 가사노동을 모두 했었다고 해요. 미국에 노예로 납치된 이후에도 남성보다 여성이 남부의 농장 노동을 더 잘 했고 동시에 가사노동까지 함께 했다고 하고요.

      차이란 언제나 구성되고 사회문화적 의미가 부여된 효과일 뿐이고요. 동시에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에 따라 역할이나 성격은 전혀 다르게 해석될 테고요. 다른 말로 본질적 차이가 있다, 없다는 인식 자체가 기존의 논쟁을 강화할 위험이 있죠. 차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사유해야 하니까요. :)

      그럼 비공개님도 환절기 건강 잘 챙기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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