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주일에 한 번 영어 수업을 듣고 있다. 아직 한 달도 안 되었지만 내가 깨달은 것 몇 가지.

10년 가까이 거의 매일 영어로 쓴 논문을 읽었는데 이게 영어 문장 공부라는 차원에서 헛된 것은 아니었구나, 싶다. 아직도 엄청 서툴고 엉망이지만, 문법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음에도 그럭저럭 문장의 꼴은 만들고 있다. 자랑할 수준이 전혀 아님에도 영어 글쓰기를 전혀 못 하는 나로선, 외국인과 만났을 때 "Thank you~"라는 말도 제대로 못 떠올리는 내 수준으로선 놀라운 일이다. 후후. 부끄러워라... ㅠㅠㅠ

말하기 듣기가 수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말하기 듣기의 핵심은 사회성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터놓고 말해서 나는 한국어로도 대화를 잘 안 하는 편이다. 퀴어락에서 일하고 있으면 여러 활동가를 만나는데 내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고, 하루 종일 인사 외엔 말 한 마디 안 하고 지낼 때도 가끔 있다. 사람 많은 자리에서도 말을 거의 안 하는데, 주로 경청하는 편이고 경청하는 걸 좋아하지 내 의견을 내거나 말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간단한 일상 대화가 안 될 때도 많은데 누군가 내게 질문하면 답변은 하는데 내가 다시 질문을 하거나 하지 않아서 대화의 벽이 되는 일이 많달까. ㅠㅠㅠ 이러한 나의 습관은 영어 말하기, 듣기 수업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니 영어를 못 하는 상황이 사회성 부족과 만나면서 엄청난 침묵을 만든달까... 질문을 했는데 뭐라고 답할지 몰라 우물쭈물한다거나,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에서 "And you?"를 못 해서 일시적이나마 대화가 침묵에 빠진다거나... ;ㅅ;

영어 말하기와 듣기가 기본적으로 꾸준한 공부와 연습이 필요하지만, 이것과는 별도로 사회성이 무척 중요한 변수란 점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리고 그나마 영어로 말을 할 때면, 내가 한국어로 대화할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말하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내가 한국어로 어떻게 말하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동안 저랑 대화하느라 고생하셨을 모든 분들께, 깊은 고마움과 사과를 전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앞으로도 별로 고쳐질 것 같지는 않아요. ㅠㅠㅠ

(가장 난감하고 미안할 때가, 특강을 하게 되어서 특강 끝나고 뒷풀이에 참가할 때다. 뒷풀이에 참가하면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기 전까진 침묵... 뭔가 무게를 잡거나 권위를 상징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는 몸이라 그냥 침묵... 그러다가 뻘쭘해서 자리를 떠나기도 한다. 내가 뒷풀이에 참가하지 않으려는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뒷풀이 자체에 재미를 못 느끼기도 하지만.)


2015/03/15 09:45 2015/03/15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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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트  2015/03/17 0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과 동떨어진 내용이지만 루인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해서 질문해요.

    전 남성성,여성성이란 단어부터 무척이나 불편합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어떤 특성을 남/여성성이라고 정의내리는건 사실이니까 단어사용에 익숙해져야 하는걸까요?
    ...저 혼자 버튼눌려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요?
    • 루인  2015/03/17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번 포스팅과는 거리가 있지만 제가 평소에 하는 이야기와는 무척 밀접하고, 말씀하신 내용이 무척 중요한 내용인 걸요! 제가 방명록을 만들지 않은 이유가, 그냥 대충 아무 글에 댓글을 다셔도 좋다는 마음에서예요. 흐흐.

      저는 고정된 의미의 남성성, 여성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긴생머리는 여성성의 상징인지, 남성성의 상징인지(록커의 긴생머리) 무척 모호하거든요. 남성성이나 여성성은 그저 그런 것이 있다라고 믿고싶어하는 사회적 관습이지 실제 구체적으로 정의하거나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아마,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분명하게 한두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최소한 한국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이 이 정의에 부합하지 않을 거예요. 혹은 많은 사람을 포함하기 위해 이런저런 내용을 추가한다면 그 자체로 엄청 모순된 내용으로 가득할 거고요.

      여성성과 남성성에 익숙해질지 말지는 직접 결정하시면 될 듯해요. 사실 이게 가장 골때리는 건, 나는 거부하는데 타인은 끊임없이 둘 중 하나로 환원해버리잖아요... 크아악. 그럼에도 이것이 불편하다면 익숙해지지 않고 계속 갈등하는 것도 삶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두 개념을 받아들여서 갈등하고 괴로워하느냐, 두 개념을 거부해서 갈등하느냐, 아님 두 개념을 거부하고 그냥 혼자 즐겁게 사느냐.. 사이에서 계속 협상하시면 될 거예요.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고 해서 다른 선택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여성성과 남성성 개념을 거부하며 즐겁게 살겠어!라고 결정해도 나는 어쨌거나 두 개념을 강하게 요구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_- 그럼에도 전 저 개념을 계속 딴지걸겠다고 결정했고 그래서 이상하게(!!!) 살고 있어요... 크크크.
    • 민트  2015/03/18 0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성스런 긴 답변 감사합니다.
      (거의) 모두가 정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남성성/여성성을 얘기하는 것을 보고 답답할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주변에선 제가 과민반응하는 거라고 하고,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정말 지쳐서 관두고 싶은데 그게 안됩니다. 아마 이상하게 태어나서 그런가봐요ㅋㅋ
      결국 이런 저를 바꿀수는 없으니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충돌할테지만, 그냥 불편해도 입닫고 귀닫고 눈감고 살아야겠죠.

      라디오에서 국내에 루인님을 비롯해서 퀴어연구자가 다섯명내외라고 하셨는데, 제가 입닫고 사는대신 언젠간 어떻게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입을 닫아야 돈을 벌고 그래야 기부도 할테지만요. 으아 답답하네요.
      어렸을땐 이민을 갈까 고민했는데 지금은 그냥 '어딜가도 이상향은 없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루인님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 루인  2015/03/28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은 정말 뭔가 '조금만 다르다' 싶으면 언제나 공격적으로 반응해서 힘들 때가 많아요. 까칠하다, 예민하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사회생활하겠느냐... 등등.
      문제는 그런 말을 들으며 스트레스를 받는데도 별로 안 바뀌는 저 자신이겠거니 싶고요. 크크크.

      요즘 케이트 본스타인의 책 [젠더 무법자]를 읽고 있는데요.
      "괴물들과 함께 선다고 해서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 오직 우리가 억압을 받아 마땅하고 이 문화에서 괴물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조롱을 받아 마땅하다고 동의할 때에만 상처를 입게 된다."(135)라는 구절이 가슴을 치더라고요.
      정말 이 말에 동의해서요. :)


      참.. 그리고 퀴어연구자가 아니라 트랜스젠더연구자가 최대 5명 정도일 거라는 뜻이었어요.. ^^; 퀴어연구자는 더 많이 있을 거고요.. 흐.
      암튼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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