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쪽글은 거의 다 소진했으니.. 곧 다시 제대로 블로깅인가...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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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6. 목. 14:00-17:00.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 정치학.

나를 멸시하는 당신의 얼굴, 두려움의 피부
-루인


캐서린 러츠(Catherine A. Lutz)와 릴라 아부-루고드(Lila Abu-Lughod)는 정서(emotion)가 사회문화적 구성이란 측면을 강조하며 담론에 대한 정서(emotion on discourse), 정서적 담론(emotional discourse)를 논의한다. 둘은 정서를 이해하는 방식을 네 가지, 즉 본질화(2-3), 상대화(3-5), 역사화(5-6), 그리고 맥락화 혹은 담론으로서 정서(6-10)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이를 통해 아부-루고드와 러츠는 정서를 개인에 내재하는 본성 같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에 관한 것”(1), “담론적 실천”(10)으로 재설정한다. 비록 정서가 개인적 혹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측면이 존재하며 이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리고 체화하는 감정을 논하지만, 둘은 정서가 내적 본질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성이란 측면에서 다루고자 한다. 이것이 그 당시의 맥락에서 필요했던 논의였는지도 모른다.

아부-루고드와 러츠가 편집한 책이 나오고 14년 가량의 시간이 지나, 정동(affect), 정서, 감정(feeling) 등을 둘러싼 논의가 어느 정도 쌓인 시점에서 사라 아흐메드(Sara Ahmed)는 정서가 본질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성이란 측면을 논하는데 힘을 쏟는 대신, 정서가 어떻게 몸을 형상(shape)하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정서가 개인에 내재했다가 외부로 표출/이동한다거나(“inside out model”), 군중의 감정이 개인에게로 흐른다는 식의 논의(“outside in model”)는 모두 정서가 이미 존재하는 것, 개인이나 집단이 소유한 것으로 가정한다. 또한 정서를 사회문화적 실천으로 설명할 때 이러한 설명은 그 의도가 무관하게 정서를 개인의 몸에서 분리시키곤 한다. 이것은 아부-루고드와 러츠가 끊임없이 경계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정서의 사회성(sociality)을 제안하는(Ahmed, 9) 아흐메드는 정서가 대상 및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 어떻게 몸의 표면과 경계를 형상하는지, 접촉을 통해 형상된 것을 어떻게 취하는지를 탐문한다. 즉, 아흐메드의 논점은 ‘정서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정서는 무엇을 하는가’이며(4), 접촉을 통해 정서가 어떻게 표면과 경계를 형상하는가다.

그렇다면 내 감정은 내 피부를 어떻게 형상할까? 어떤 접촉에서 어떤 감정이 내 피부를 형상하도록 작동하고, 어떤 접촉에서 나는 어떤 감정의 피부를 취할까? 도미야마 이치로는 『폭력의 예감』에서 두려움과 폭력을 예감하는 감정이 구성하는 몸의 표면과 경계, 글의 몸[文體]을 논했다. 그리하여 도미야마의 작업은 폭력과 감정의 교차지점을 살피는 사유기도 하다. 다른 말로 내 피부를 형상하는 감정을 독해하는 작업은 내 몸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감정의 피부가 이 사회에서 어떤 이론적 맥락에 위치하는지를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Abu-Lughod & Lutz, 13), “접촉 지대로서의 아카이브”(Ahmed, 14)인 피부를 살피는 작업이다.

다소 얌전하고 평범하게 생겨서 매우 ‘규범’적 피부로 살고 있는 내가 근래 들어 빈번하게 듣는 말은 “아유, 여자인 줄 알았어요”다(그래서 지금은 무엇으로 알고 있다는 것일까?). 특히 알바하는 곳에서, 예전에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날 때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혼잡한 점심시간의 식당에선 때때로 “아가씨, 음식 나왔어요”란 말을 듣기도 한다. 공공연히 혹은 선별적으로 mtf 트랜스젠더라고 말하거나 글을 쓰는 내게 ‘여성’으로 인식되는 찰나는 즐거운 순간일 수 있다. 실제 나는 그런 반응을 들으면 빙긋 웃으며 몸이 말랑해지는 것을 느낀다. ‘남성’으로 더 많이 통과되는 상황에 상당한 불편과 갈등을 느끼기에 ‘여성’으로 인식되는 찰나는 분명 즐거운 순간이다. 내가 ‘남성’으로 인식되면 안 되기 때문에 ‘여성’으로 통하는 시간이 즐거운 것이 아니다. 나는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며, 남성도 여성도 아닌 트랜스젠더로 나를 범주화하기에 때때로 누군가가 나를 ‘남성’으로 인지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너무 많은 순간에 ‘남성’으로만 통해서 갈등이 발생한다(이런 이유로 나를 ‘남성’으로 분류하는 인식이 상당히 불쾌하다). 그러니 (짧은 순간이나마) 나를 여성젠더로 인식하는 이들과 접촉하는 순간, 보잘것 없는 내 몸으로 어떤 교란의 가능성을 만들었다는 기쁨에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몸은 이원 젠더 규범을 한순간이나마 교란할 가능성을 지닌 몸으로 변한다.

하지만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통하지 않고 모호한 젠더로 통하길 원하는 트랜스젠더인 나는 ‘여성’으로 독해되는 순간이 즐겁지만은 않다. 이렇게 나와 상대가 접촉하는 순간, 나는 빙긋 웃으면서 부드러워지지만 또한 내 몸은 굳어간다. 굳어가는 몸은 상대가 나를 ‘여성’으로 독해하는 방식으로 접촉하면서 생긴 사건인 동시에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이 깊숙하게 개입하고 또 그 얼굴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나는 트랜스젠더로 통하는데 확하거나 성공하지 못한다. 실패 혹은 성공하지 못함은 나가 기획하는 세계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겹쳐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건,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인식론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내 몸은 충돌하는 규범이 공존하면서 형상을 갖춘다. 충돌하는 규범이 내 몸에 수집되고 등록된다(archive).

그런데 나를 적대하거나 멸시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 상대방의 얼굴을 먼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여성인 줄 알았다’고 웃으며 말하는 반응보다, 나를 적대하고 멸시하는 표정으로 보는 얼굴이 때때로 좀 더 편하다. 적대적인 표정으로 나를 보거나, 멸시하는 감정을 담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상대와 접촉하며, 내 몸은 좀 더 느긋해진다. 멸시하는 반응은 그가 체화하며 살고 있는 젠더 규범과 그에  따른 규범적 감정 표현으로 우리의 접촉을 형상한 것이자, 우리가 접촉하는 순간에 그의 몸과 내 몸을 재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니 그의 얼굴은 내 몸이다. 나를 보며 느끼는/해석하는 그 불쾌함, 불쾌함을 드러내는 얼굴의 표정이 내 몸의 형상이다. 멸시하는 상대의 표정이 내 피부다.

상대의 얼굴이 내 몸의 형상이라면, 그래, 우리 둘의 몸을 형상하는 또 다른 감정 중 하나는 두려움이다. 내가 상대방의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혹은 폭력의 예감)이 내 삶을 형상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굳이 그가 아니어도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수시로 느끼는 감정이다. 두려움. 혐오폭력은 우발적으로 발생하기보다 사전 기획에 따라 발생하는 경향이 있기에 물리적 폭력이 그리 쉽게 발생하지는 않음을 안다. 그럼에도 혐오폭력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내 몸이 더욱더 ‘모호한’ 젠더로 독해될 수록 그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두려움.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독해되는 ‘폭력’이 발생할 상황을 떠올리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가 덜 ‘모호한 젠더’일 수록 나는 젠더 해석의 폭력, 인식론적 폭력, (평범하다고 얘기하는)이성애규범적 대화의 폭력에 노출된다. 물론 이런 폭력은 내가 원하는 젠더로 인식될 때도 발생하지만 그 양상은 다르다. 그런데 나는 영원히 내가 원하는 방식의 젠더로 인식되지 못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방식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고, 내가 타자 혹은 세상과 접촉하며 발생하는 감정은 내가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아직은 다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있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형상하면서.
2015/01/12 06:12 2015/01/12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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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12 2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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