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스트레스성 뇌전증(간질)에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더니 남자의 몸을 가진 '정신적 여성'으로 변했다. 레이철은 "최근 들어 여자가 되고 싶다는 걸 느꼈다. 여자가 내게 맞다"고 말했다.
어느날 여자가 된 美 중학생의 '여성권리' 찾기
연합뉴스 | 입력 2014.08.17 02:30


남학생으로 잘 지내다가 스트레스성 뇌전증, 우울증, 공황장애를 겪으며 여성으로 자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기사다(댓글은 가관이니까 통과하시길). 영어판 뉴스에선 어떻게 설명했는지 모르겠고, 일단 번역 기사만 확인했을 때 몇 가지 재밌는 가정을 할 수 있다. 학교의 대응에 분노스러운 것은 일단 젖혀두고.

ㄱ. 정말로 스트레스성 뇌전증, 우울증, 공황장애를 겪은 다음 자신의 젠더 인식이 변한 경우
ㄴ. 이전부터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했지만 밝히지 못 하고 있다가 다른 이유로 스트레스성 뇌전증 등을 겪은 다음, 이 병을 핑계 삼아 말을 한 경우
ㄷ.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못 밝히고 지내다가 바로 이런 이유로 스트레스성 뇌전증 등이 생겼고 그래서 밝힌 경우

보통은 ㄷ의 가능성을 얘기하거나 ㄷ의 가능성으로 추정할 것 같다. 대중에게 널리 퍼진 트랜스젠더 서사에선 ㄷ이 가장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ㄴ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나는 ㄱ의 가능성으로 이 사람이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혹은 자신의 젠더 인식이 바뀌었다고 설명한다면 뭔가 더 재밌을 듯하다. 이런 설명이,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으로 발병하는 문제라고 해석할 위험을 내포한다고 해도 젠더 인식을 이해하는 방법의 변화를 모색할 여지도 주기 때문이다. 위험하지만 위험하다고 다양한 가능성을 죽이고 상상력을 제한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것이 기각될 상상력이라고 해도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트랜스젠더가 정신병이 아니라고 주장할 때, 정신병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태도가 생길 가능성이 상당하다면 이 찰나는 비판 받아야 한다. 그래서 정신병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신병을 혐오하지 않는 방식, 혹은 정신병이건 아니건 무슨 상관이냐고 주장하면서 트랜스젠더 범주와 정신병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방식 등 뭔가 다른 방향 모색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곤란한 상상력은 없을까?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상상력은 없는 걸까? 이것 또한 고민이지만)

그래서 나는 ㄱ의 가능성으로 이 사람의 삶을 설명한다면 어떤 다른 가능성이 발생할지 궁금하다. 지금은 그냥 궁금한 수준이지만...


2014/08/17 06:18 2014/08/17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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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은아  2015/03/11 1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사람이 성 정체성 장애를 겪는다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그 사람의 심리적 혼란이 말 그대로 성에 관련된 영역으로 국한되며, 다른 정신적 문제는 없을 경우에 F64로 진단이 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말씀처럼 조현병이나 조울증 등 다른 정신 질환에 의해서 성 정체성의 혼란이 오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자신도 그 혐의로부터 그닥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제가 바로 ㄱ의 케이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성장 과정에서 대체로 스스로를 "여성적인 남자"정도로 인식했지, "MTF 트랜스젠더"라고 명시적으로 인식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거든요. 아마 제가 여자를 좋아하고, SRS 또한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나도 트젠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해봤던 거 같습니다. 그러다가 재작년 무렵에 조울증 비슷한 증상이 심화되는 것과 함께 정체성의 혼란이 뒤늦게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거구요.

    실제로 약물치료&입원치료를 거치며 조증 증상이 가라앉았음에 따라 성 정체성에 관한 불안정한 심리가 어느 정도는 가라앉더군요. (뭐 지금도 그 강도가 약해졌고 심리가 안정되었다 뿐이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여전히 "최소한 나는 일반적인 남자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긴 합니다만...)

    아무튼 "조현병,조울증 등 다른 정신질환에 의해 (일시적으로)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
    그런 이들을 일종의 "가짜 트젠"으로 봐야 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착각에 의한 것일망정 본인 스스로가 "내 성별은 잘못되었다"라는 생각을 일시적으로나마 품고 있으니
    우리들도 "네, 님 또한 트랜스젠더 맞습니다"라고 말해주고 그 사람을 트젠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환영하는게 맞을지,

    아니면 "님은 번짓수를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님의 문제는 성 정체성 장애가 아니고 다른 정신병이므로, 빨리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해주고
    그 사람이 트젠이 아닐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성 전환 이외의) 다른 해결 방식을 추천해줘야 할 지...

    혹은 그런 판단은 속 편하게(?) 정신과 의사에게 위임하고, "F64.0을 받았는가?" 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을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이번에는 젠더퀴어/안드로진/바이젠더/뉴트로이스/에이젠더/팬젠더 등 트랜스젠더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포괄될 수 있을 사람들을 배재해버리고,그리하여 결국 '트랜스젠더'라는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넓고 다양한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리는 결과가 될 거 같아서 또 그것도 단점이 있고...

    저는 아직 많은 트랜스젠더를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몇 몇 사람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성장 과정 자체에서 가정 환경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순탄치 못했던 경우가 많아 보였습니다. (성적인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말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심리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위축된 자아상을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과 통합하는데 실패한 것이 아닐까, 혹은 답답한 현실에 대한 돌파구를 찾으려하는 감정이 "자신의 현재 존재 자체를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구"로 전이되어 성 전환을 꿈꾸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찌해야 될 지 모르겠네요.
    • 루인  2015/03/14 0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하신 내용을 읽고 나니 문득 떠오르기를 제가 저를 트랜스젠더로 설명하기 1~2년 전에 심각하게 우울증을 겪었고 계속해서 자살충동에 시달렸어요. 그 증세가 어느 정도 완화되고 난 다음에야 스스로를 트랜스젠더로 설명했는데요. (물론 우울증이 트랜스젠더와 관련은 거의 없었고요). 둘을 연결하려고 하면 또 아예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 역시 레즈비언이고 수술을 원하지 않고 의료적 조치와는 갈등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어쨌거나 트랜스젠더라고 떠들고 다니고 있어요. 저를 트랜스젠더라고 부르기가 참 힘들었는데(한국에선 트랜스젠더면 다 이성애자고 수술을 원한다고 가정하니까요) 그럼에도 제가 트랜스젠더라고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이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는 문제기도 하고요.

      "조현병, 조울증 등 다른 정신질환으로 성별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경우"를 어떻게 불러야 할것이냐에... 조금 무책임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서둘러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결정하지 않고 여유있게 몇 년이고 몇 십년이고 기다려주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동시에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바꾸는 걸 비난하지 않으며, 의심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싶고요.

      전 의사가 결정하는 것은 절대로 반대해요. 성별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고 모두가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는 아닐 것이고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가 모두 (흔히 말하는)심각한 수준의 혼란을 겪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이것을 서둘러 결정하도록 재촉하지 않으면서 좀 천천히 고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다 싶어요. 20대의 어느 순간 이런 고민을 시작해서 50대나 70대에 결정할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결정하지 않은 상태로 둬도 괜찮은... 그러니까 성별을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확정하지 않는 분위기이길 바란달까요.

      다른 한편으로 성별을 계속 바꿔 말하는 것, 즉 언제는 '나 트랜스여성이야'라고 말하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 '나 트랜스젠더 아냐, 나 그냥 남자야'라고 했다가 다시 시간이 지나면 '나 젠더퀴어야'라고 말하는 식을 '말 바꾸기'니 '진정성 없음'이니 하면서 엄청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잖아요. 하지만 이런 시선이 없어지면 좋겠어요. 비트랜스젠더의 사회에선 이것이 시간이 더 많이 걸리겠지만 적어도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선 좀 더 이런 여유가 생겼으면 하고요.

      그래서 그냥 그때그때 내가 원하는 식으로 바꿔 말할 수 있는 분위기면 좋겠어요. 사실 이런 것 자체가 개개인에겐 무척 힘든 일이고 많은 갈등을 야기하기도 하지만요. 무엇보다도 타인이 함부로 재단하지 않기를 바라고요. 이것은 타인이 함부로 판결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정체성의 변화나 고민을 타인(비트랜스젠더건 트랜스젠더건 상관없이)이 함부로 판단한다면 이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라고 믿어요...
  2. 달의 시  2019/09/19 15: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흘러들어왔는데, 굉장히 흥미로운 글을 쓰셨네요. 링크하신 기사도 읽어봤습니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신선한 충격도 느꼈으며, 이 글을 읽은날의 일기장 한 페이지는 이 글에 대한 제 감상으로 채워졌네요.
    일반적인 퀴어 커뮤니티에선 쉽게 언급될 수 없는 주제인 만큼, 희귀한 책을 읽는 기분으로 이 글을 몇번이나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남성성이 더 강한 안드로진이며, 2012년 2월에 성 동일성 장애(GID) 및 성전환증을 진단 받았습니다.
    확진은 아니고 임상적 추정이라, 확진때는 F64.0 대신 F64.8이나 F64.9를 받을 가능성도 있긴합니다. 개인적으론 제가 F64.0까진 아닌것같아요.

    사실 저를 진단하신 의사 선생님 모두, 제가 ㄱ인 경우일거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우울증과 제 성 정체성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며, 그런 상황에서 성 정체성 문제가 우울증을 악화 시켰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저 또한 우울증이 성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제 자세와 판단에 영향을 준 건 맞다고 생각하나,
    우울증을 앓은 뒤로 제가 안드로진이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우울증을 앓기 전 어린 시절에도 이미 제 성별 관념은 남들과 다른것같다고 의식하고 있기도했고요.

    그럼에도, 이 글에서 다뤄지는 아이디어가 너무나 신선했던만큼, 만약 제가 ㄱ인 케이스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봤습니다.
    만약 자상하지만 매우 엄격했던 어머니께서 어린 제게 큰 영향을 주었다면?
    친구 한 명 없이 매일 울기만했던 중고교 및 대학 시절이 제게 큰 영향을 주었다면?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때부터 겪었을 우울증이, 제 정체감이나 판단 자체를 뒤흔들었다면? 정말 상상만으로도 이런저런 감상이 느껴지더랍니다.

    머릿속이 잘 정리되지않는 기분이라 정리된 내용만 덧붙이자면, 저는 루인님과 의견을 같이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조현병이라든가 기타 정신질환을 앓은 뒤에 입장이 바뀐 사례를 본다해도,
    저는 전혀 불쾌감이나 복잡한 기분을 느끼지않고 중립적으로 그분을 바라볼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실 수 있게 조용히 응원하거나 합리적인 조언을 드릴수도 있을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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