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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0. 월. 15:00- 쪽글. “왜 성실한 사람은 조롱받는가”
성실하게 일탈하는
-루인


약속한 일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믿는 나는 흔히 말하는 ‘일탈’을 싫어하는 편이다. 원고 마감이 오늘 밤 10시까지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을 지켜서 제출해야 한다. 내일 알바하러 가야 한다면, 오늘 밤 갑자기 동해의 밤바다가 보고 싶다고 해도 출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서 잠들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알바를 하며 지각이나 결석을 한 적 없다. 미리 약속한 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고, 바로 그 일정을 지키기 위해 일상을 재조정할 때도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종종 “답답하고 고리타분하게 산다”, “재미없는 삶을 산다”는 얘기를 듣는다. 가끔은 내 정치학과 삶이 다르다는 얘기도 듣는다. 트랜스젠더 맥락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이라면,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내 의사와 무관하게 내가 진보로 분류된다면, 일탈이나 방종이 자유로움의 표상이며 진보적 삶의 상징이라고 ‘오인’된다는 점에서 나는 일탈이나 방종을 즐겨야 할까? 다른 말로 어찌하여 일탈적 행동이나 방종이 자유로움과 급진성의 상징을 획득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행위는 보수성의 의미를 취득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를 테면, 의외로 많은 비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라면 삶을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종종 규범도 위반하면서 살 것이라고 믿는다. 트랜스젠더라는 범주 자체가 이미 규범 위반이란 언설도 있다. 물론 무언가를 위반하는 일이 발생하긴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이원 젠더 규범을 위반하는 것인지 이원 젠더 규범이 인간의 다양한 삶을 위반하는지는 더 논의할 사항이다. 무엇보다 의료적 조치를 선택한 많은 트랜스젠더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정말 성실하게 일상을 유지한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호르몬을 투여하기 위해 일상을 관리하고, 혹시나 호르몬의 효과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까봐 음식을 조절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라는 존재 자체는 (본인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일탈’일 수 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개개인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까지 ‘일탈’이거나 ‘자유’로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료적 조치를 하는 많은 트랜스젠더는 ‘일탈’ 혹은 ‘자유’롭다고 얘기하는 바로 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정말 성실하게 살아간다.

혹은 1960-70년대 미국 사회에서 반전운동과 히피 문화가 유행일 때 많은 ‘남성’이 긴 머리카락에 하늘하늘한 남방을 입고 다녔다. 그 당시 그런 복장은 진보의 상징이거나 저항의 상징이었다. 그 시기 트랜스젠더, 특히 mtf 트랜스젠더는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혹은 그런 문화와 무관하게 ‘여성’스러운 복장을 하고 다녔다. 히피 문화의 유행은 mtf 트랜스젠더의 삶을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했다. 하지만 히피 문화의 유행이 끝나자 트랜스젠더 혐오는 더욱 심해졌다. 이제 mtf의 삶은 철지난 유행이 되거나 ‘어색한 몸에 걸친 과잉 여성성’이 되었다. 트랜스젠더는 당대 급진적 정치학을 전유하던 이들에게 여성성 혹은 남성성을 수호하는 보수 집단으로 찍혔고 상당한 혐오 발화를 들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 1990년대가 되었을 때 트랜스젠더는 다시 급진적 정치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지금은? 트랜스젠더는 급진적 젠더 정치의 최전선에 있다는 언설과 기존 젠더 규범의 수호자라는 언설을 동시에 들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태도, 성실한 삶의 자세가 당대의 문화적 의미 체계에 따라 급진적 정치가 되기도 하고 반동적 실천이 되기도 한다. (때론 반동인 동시에 진보가 되기도 한다.) 토마스 프랭크가 설명했듯 캔자스에서 미국의 ‘평균적’ 삶을 살아온 사람, 혹은 한국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하는 사람 역시 비슷할 것이다. 과거 어떤 시기엔 자신의 삶이 매우 급진적이거나 진보적이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다른 어떤 시기엔 보수적이라고 평가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성실한 태도는 고리타분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꼰대같거나 보수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프랭크는 보수 기독교 혹은 근본주의 기독교가 경제 개념을 누락하는 문화 정치를 통해 캔자스의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바꾸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프랭크가 설명하는 문화 정치는 단순히 낙태 반대 운동, 반동성애 운동이라는 대의명분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대의명분 속에 ‘평범’한 삶을 위로하는 어떤 지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성실한 삶이 고리타분한 옛것으로 취급된다면, 퀴어는 비전통적 수입품이란 언설이 팽배하다면, 혐오가 전통이며 가치있는 삶의 양식이란 언설을 빈번하게 들을 수 있다면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할까? 다른 말로 ‘내’ 삶을 위로하는 언어가 보수 우파의 언설에 녹아있는 것은 아닌지. 예를 들면 ‘당신은 잘 살아왔다, 그런데 저들이 당신의 삶을 부정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반드시 이렇게 이항대립의 형식은 아니겠지만.

프랭크는 보수 우파 활동가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 말을 걸고 설득한다고 얘기한다. 트랜스젠더 이론, 퀴어 이론을 하는 나는 사람들이 퀴어 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데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그리고 트랜스젠더가 차별받고 있다는 식의 언설말고, LGBT는 차별받고 있다는 언설말고, 비트랜스젠더 혹은 LGBT가 아닌 사람의 정동을 건드리면서 함께 얘기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얼마나 하고 있을까? 단지 퀴어 이론에 문외한이란 이유로, 혹은 얼마간의 혐오 발화를 했다고 해서 한 개인의 삶을 매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성실하다는 이유로 내가, 혹은 트랜스젠더가 일방적으로 평가받는 것엔 흥분하면서 다른 상황에선 내가 타인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014/05/24 06:13 2014/05/24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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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5/24 0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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