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년은 걸릴 것이라고 각오했다. 하지만 이 엄청난 경계와 하악질로 인한 갈등을 기대하진 않았다.

첫 날 밤 보리는 베개와 벽 사이로 숨었고, 그 자리에서 내가 꺼내지 않는 이상 계속 있었다. 바람은 이불 속에 숨어 있다가 마루의 캣타워로 갔고 그곳에 계속 머물렀다. 하지만 자기 위해 불을 끈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보리가 오기 전까지 바람은 늘 내 곁에서 잠들었고 적어도 잠들기 시작할 땐 내 곁에 있었다. 캣타워를 구매한 뒤론 캣타워에서 자는 일이 많았고, 잠들 땐 나랑 있었는데 새벽에 캣타워로 가선 내가 자기 곁에 오길 바라며 부르곤 했다. 그래서 캣타워 구매 이후 새벽에 바람이 날 불러서 잠에서 깰 때가 많았다. 그런데 어젠 상황이 좀 달랐다. 내가 자겠다고 불을 껐을 때도 바람은 캣타워에 있었다.

그리고 일은 시작되었다. 불을 끄기 전까지 바람은 방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방문 앞에서 하악하며 위협하다가 내가 바람을 데리러 나가면 캣타워로 후다닥 가곤 했다. 그럼 난 바람을 쓰다듬어 주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불을 끈 다음 바람은 위협하며 방으로 들어와선 베개 뒤에 있는 보리를 위협했다. 하악, 캬악. 그 상황을 그냥 둘 순 없기에, 그리고 바람이 방에 들어왔으니 나는 바람을 달랠 겸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리고 베개 사이로 손을 넣어서 보리도 쓰다듬었다. 그렇게 바람은 잠시 보리를 위협하다가 캣타워로 돌아갔다. 그럼 나는 다시 자세를 잡고 잠들려고 했다. 잠깐 잠이 들만하면 바람은 다시 방으로 와서 베개 뒤의 보리를 위협했고 나는 한 손으로는 바람을 달래고 다른 손으론 보리를 달랬다. 이게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러니까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얘기다. 근래 많이 피곤해서 푹 자려고 했는데 오히려 잠을 못 잤다는 얘기다.

새벽에야 조금 진정되어 잠깐 눈을 붙인 다음 멍한 상태였다. 그리고 아침, 오전, 오후.

보리는 직접 밥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손바닥에 사료를 올려주면 그땐 아그작 아그작 맛나게 먹었지만 밥그릇에선 직접 먹으려 하지 않았다. 아울러 물도 먹으려 들지 않았다. 낮엔 일부러 바람과 가까운 곳에 있으려 했고 그래서 마루에 머물렀다. 보리는 방에서 앙앙 울었고 마루로 데려왔고 바람은 하악하악. 그리고 보리는 책장 틈 사이에 적절한 자리를 찾았다. 그리하여 바람은 캣타워에, 보리는 책장 틈에 머물고 나는 그 사이에 앉아 있는 형상이었다.

한편으로 보리가 걱정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바람이 걱정이다. 밤새 사료를 전혀 안 먹었고 오전에 물만 좀 마셨다. 그 이후론 계속 잠만 자거나 바람의 눈에 보리가 보이면 하악하며 경계하기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밤에, 엘라이신을 주니 그건 잘 먹었다. 그래서 고민인 건, 이틀 정도 밥을 더 안 먹으면 병원에 데려가거나 아니면 아예 영양젤을 구매해서 먹일까 싶다. 어느 쪽으로 진행할지는 내일 더 지내보고.

바람의 기에 눌린 보리는 마루에서 계속 책장의 책 사이에 머물렀다. 나는 가끔 보리를 책장에서 꺼내 방으로 데려갔고, 손에 사료를 올려 밥을 먹었다. 다행이라면 손에 사료를 올려서 주면 잘 먹는달까. 물을 안 마시는 것이 문제였다. 아울러 화장실을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는데. 오후 늦은 시간에 보리는 처음으로 화장실을 사용했다. 한숨 돌렸달까. 그리고 저녁 즈음 방으로 옮겼더니 그때부터 보리는 신나게 뛰고 밥도 먹고 물도 열심히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냐면 보리의 밥그릇이 따로 있음에도 바람의 밥그릇의 사료도 먹는달까. 바람의 밥+물, 보리의 밥+물이 방의 다른 자리에 있는데 움직이다가 보이면 그냥 먹는 수준이다. 물로 나름 잘 먹기 시작해서 화장실만 알아서 잘 사용하면 다행일 듯.

일단 방에 있으니 방 안에서 우다다 하다가 간혹 마루에서도 잠시 우다다하다가, 때론 내 배 위에 올라와서 골골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녀석, 발톱 자를 생각을 안 한다. 발톱 자르려고 몸을 압박하는데 어떻게든 빠져나간다. 더 정확하게는, 몸이 너무 작아서 내가 차마 힘을 더 많이 못 준달까. 발톱을 당장 잘라야 하는 이유는, 내 옷을 스크래처처럼 사용해서 보리의 발톱이 온전히 살에 박힌다. ;ㅅ;

오전엔 바람과 보리 모두가 걱정이었는데 저녁 이후론 보리는 덜 걱정이고 바람이 더 걱정이다. 일단 밥이라도 좀 먹으면 좋을텐데. 끙.

둘이 사이 좋게 지내는 건 현재 목표가 아니다. 바람이 보리를 봐도 무시하면서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기만 해도 다행이다. 단, 현재 보리의 덩치가 너무 작아서 바람이 하악하면 보리가 바들바들 떤다는 게 문제. 이건 한편으론 바람에게 다행인데 만약 보리가 어느 정도 다 자라서 덩치가 있었다면 바람은 더 힘들었을 듯하다. 다른 한 편으론 보리에겐 안타까운 일인데,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랄테니까.

2014/05/04 06:15 2014/05/04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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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고  2014/05/04 18: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헐 역시 참이랑 같은 증상......ㅠ
    • 루인  2014/05/05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민한 게 아니라 그냥 겁이 엄청 많은 고양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ㅅ;
      리카는 안 그랬는데! 리카는 낯선 사람이 와도 도도하고 우아하게 접대했는데!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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