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이었나 여름이었나. 알바를 하는 곳에서 ㄱ은 사업 기획안을 올렸으나 팀장에게 깨졌다. 자리에 돌아온 ㄱ은 화를 내면서 ㄴ에게 말했다, 요즘 슈퍼 을이 유행이라는데 우리도 슈퍼 을 하면 안 돼? 우리가 일 다 하잖아. ㄱ의 말에 ㄴ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ㄱ이 특별히 더 권력의 눈치를 안 보고, ㄴ은 권력에 눈치를 보고 라인을 잡으려고 애쓰는 성격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둘 다 결제라인의 눈치를 안 보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 다만 ㄱ은 정규직에 특별한 과실만 있지 않다면 정년보장이 된 상황이었고 ㄴ은 해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계약직이었다. ㄴ은 꽤나 오래 재계약을 해왔지만 작년엔 회사의 판단에 따라 재계약이 안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부서에선 재계약을 하려고 했다). 그리고 올해, ㄱ은 정기 인사이동에 따라 다른 부서에 갔고(절대 보복 인사이동이 아니다) ㄴ은 재계약을 못 했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에서 슈퍼 을이 되자고 하는 기묘하고 웃긴 상황. 슈퍼 을이란 말이 나왔던 그때, 한국 사회에선 <직장의 신>이 화제였다.

뒤늦게 <직장의 신>을 보고 있다. 이제 초반 몇 화를 봤지만 일단 재밌다. 진작 봤으면 더 재밌을 텐데. 처음엔 슈퍼 을인지 슈퍼 갑인지 헷갈리는 미스 김이 좋았다. 내가 슈퍼 을이란 위치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 따위가 무슨 슈퍼 을. 그냥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일개 알바일 뿐인데. 단지 미스 김이 칼출근에 칼퇴근하는 모습이 나와 같고, 근무하는 곳에서 다른 직원과 업무 이외의 관계를 엮지 않는 모습이 같아서 그랬다. 나는 그곳에서 몇 년을 일했지만(해마다 재계약하고 있고 내년에 재계약을 할지 하지 않을지는 결코 알 수 없다) 단 한 번도 지각한 적 없다. 다른 많은 정규직이 빈번하게 지각을 하지만 난 한 번도 그런 적 없다. 그리고 나는 늘 계약한 시간까지만 일한다. 칼 퇴근이다. 1-2분 정도 늦게 퇴근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 더 일한 적은 지금까지 통틀어 다섯이 안 된다. 그리고 몇 년을 같은 곳에서 일하지만 나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핸드폰 번호를 모르고 나를 관리하는 사람을 비롯하여 업무 이외의 일로 얘기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니 초반엔 미스 김에 감정이입했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 수록 정주리(미스 김과 마찬가지로 3개월 계약직)에게 감정이입한다. 물론 안타깝고 속이 터진다. 하지만 계약직으로 살아가는 내 삶은 미스 김과 같을 수 없다. 미스 김이 멋져 보일 순 있어도 내 삶은 아니다. 난 미스 김처럼 우아한 집에서 살지 않으며 그렇게 완벽하고 또 못 하는 것 없는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서둘러 걷고 복잡한 지하철에서 인파에 시달리고 그날 그날 할 일을 처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가끔은 딴 짓도 한다. 아울러 나는 내 일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초반까지만의 성격으로, 정주리가 불안하고 속이 터지는 캐릭터라고 해도 그게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학생이지만 비정규직 알바 혹은 계약직으로 살아가는 나는 정주리란 캐릭터에서 내 모습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스 김이 아무리 멋지고 속이 시원한 캐릭터라고 해도 회를 거듭할 수록 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 처음엔 미스 김의 속이 후련한 행동에 무척 기뻐했지만 회를 거듭하니 그냥 무덤덤하다. 대신 정주리의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모습이 더 신경 쓰인다.

덧붙이면, <직장의 신>에서 내가 일하는 곳의 모습을 많이 발견한다. 단적인 예로 회사 업무의 상당수, 그리고 실질적인 것은 계약직이 한다. 중요한 일을 비롯해서 소프트웨어는 정규직이 담당하고 비정규직 혹은 계약직은 자잘한 업무만 한다는 건 명백한 착각이다. 실질적 업무와 많은 주요 기획을 계약직이 한다. 그리고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계약직이다. 모든 정규직이 그렇진 않겠지만 많은 정규직이 아침에 출근하면 인터넷쇼핑을 하거나 그냥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물론 입으론 바쁘다는 말을 하지만 커피를 마시러 간다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더라.

그리고 내가 계약직이란 위치를 지각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이런저런 추가 수당 등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계약을 할 때 상당히 확실하게 느낀다. 일정 기간 계약을 하면서, 만약 내가 중간에 관두면 나는 총 계약금액의 15% 수준에서 배상을 해야 한다. 그럼 회사가 정당한 이유없이 일방적으로 짜르면? 이에 대한 보상 기준은 없다. 이것이 2000년대 노예인 계약직의 지위다.

2014/03/03 06:13 2014/03/03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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