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쪽글입니다. 이틀 연속 새벽에 잠들었네요.. 어젠 급하게 마감해야 하는 원고를 쓰느라 새벽 2시 넘어 잠들었고, 오늘은 제가 약속한 일이 있어 새벽에 자네요.. 괜찮아요. 모두 재밌는 일이니까요. :) 하지만 쪽글로 때우는 건 유쾌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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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6.화. 13:00-
죽음을 사유하는 방법
-루인

죽음은 어쩌면 고인이 속한 공동체와 유족이 속한 공동체가 경합하는 사건이며, 고인과 유족의 관계가 이 사회에서 어떻게 의미화되는지를 드러내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 고양이와 아버지와 동료 활동가의 죽음 및 장례식을 겪으며, 이 과정에 얽힌 복잡한 정치학의 단면을 엿보았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죽음은 삶의 연장이자 다양한 정치적 범주가 가장 첨예하게 작동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죽음과 장례식은 매우 정치적 행위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죽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임스 린데만 넬슨(James Lindemann Nelson)의 글은 죽음에 작동하는 정치학을 읽는다. 역사적으로 죽음이 어떻게 이해되었고 죽음에 젠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탐문함이 넬슨의 주요 논점이기도 하다. 넬슨이 논하는 몇몇 연구자는 죽음이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에게 어떻게 달리 해석되는지를 조사했다. 이를 테면 청년의 죽음은 애석한 비극으로 인식된다면 노년의 죽음은 그럴 수 있는 일로 인식된다(115). 이것은 죽음이 나이와 세대에 따라 다른 사건으로 이해된다는 뜻이며 죽음이 결코 동질적 의미의 사건이 아님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나이/듦이 죽음에 지배적 영향을 준다는 가정을 전제한다(116). 나이듦만이 죽음에 영향을 끼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죽음은 계급과 계층에 따라 달리 이해되었다. 죽음이 모두에게 동질적 사건이란 인식은 죽음을 둘러싼 정치적 경합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죽음이 모두에게 동질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예를 들어 죽으면 귀족이건 부자건 하층민이건 빈자건 모두의 몸은 썩어 없어진다)은 그렇게 간단한 인식이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죽음은 계급마다 다른 가치였고, 귀족이나 하층이나 죽으면 같다는 사실은 귀족 계층에게 굉장히 충격적 인식이기도 했다(118).

그렇다면 죽음은 나쁜 사건, 삶에 해를 끼치는 사건이기만 한 것일까? 죽음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는 앞으로 가능할 어떤 재화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고 겪을 수 없다는 데 있다(119-21).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삶을 어떻게 기획하고 삶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와 관련한 이슈기도 하다. 넬슨은 이를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제목 아래 두 가지 다른 자아 개념으로 설명한다(121-4). 첫째, 커리어 자아(career selves)는 성공 등 단일한 목표에 따라 ‘합리적으로’ 삶을 기획함과 같다. 이것은 시장의 가치에 따라 삶을 구성하는 것이며, 이 개념에서 중요한 건 개인과 행위성이다. 둘째, 연속적 자아(seriatim selves)는 커리어 자아와 달리, 삶을 다양한 상황과 역할, 직업 등으로 엮어가며 사유하는 방식이다. 연속적 자아에서 중요한 건 개인보다는 관계다. 연속적 자아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며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이렇게 삶을 다르게 기획한다면 그 삶이 받아들이는 죽음 역시 전혀 다르게 의미화된다. 그리하여 삶 뿐만 아니라 죽음 역시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다면적 사건이라면 죽음은 젠더에 따라서도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 넬슨의 주장이다.

넬슨의 죽음 논의는 흥미롭지만 이 논의엔 죽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몇 가지가 주요 논의가 빠져 있다. 그 중 하나는 종교며 다른 하나는 의료 승인체계다. 비록 종교가 더 이상 이 사회의 지배 규범적 가치 체계가 아니라고 해도 종교는 여전히 우리 삶에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죽음을 애도하는 의례는 많은 경우 종교적 삶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아울러 의료제도는 죽음을 승인하는 유일한 권력이다. 현대 사회의 모든 죽음은 오직 의료 승인체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의사/의료제도의 인정이 없다면 그 죽음은 ‘아직은 살아 있음’과 같다. 이런 점에서 종교를 갖고 있는 여성이 의료 제도에서 겪는 곤란을 다룬 페기 데스오텔스(Peggy DesAutels)의 논문은 흥미롭다.

데스오텔스에 따르면, 의료 윤리를 다루는 생명의학자와 페미니스트는 종교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종교를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 의례로 이해하는 생명의학자에게 종교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일부 페미니스트에겐 가부장적 가치와 성차별주의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장치인 교회를 긍정적으로 다루기 힘들었다. 하지만 통념과 통계에 따르면 남성보단 여성이, 청년보단 노년이 종교와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있고 더 자주 기도를 한다. 아울러 남성보다 여성이 아동 양육과 노인의 보살핌, 여성 생애 단계의 의료화 등 다양한 이유로 의료체계와 더 잦은 관계를 갖는다. 그러니 종교를 갖고 있는 노년 여성이 의료체계에서 어떻게 윤리적 판단을 하는지는 중요한 이슈다.

데스오텔스는 흥미로운 두 가지 에피소드로 논의를 전개한다. 첫째, 병원의 윤리위원회에 참석한 종교적 여성은 의료윤리적 판단을 어떻게 하는가? 데스오텔스는 일반 병원의 윤리위원회에서 어떤 안건을 판단할 때 참석자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안건을 판단하지는 않는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종교와 밀접한 병원(가톨릭병원 같은 경우)의 윤리위원회 역시 종교적 신념으로 안건을 다루지 않는다. 종교적 판단과 세속적 판단이 일치해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세속적 판단에 따르면 고통은 피해야 하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방향으로 의료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다. 종교적 판단에 따르면 고통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며 때때로 가치있는 영적 성장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위원회에 속한 수녀나 다른 사람 모두 종교적 신념 및 윤리가 세속적 판단과 충돌할 때, 종교적 신념을 발화하기보다는 침묵을 지킨다(181). 둘째, 의료적 조치를 거부하는 종교적 여성을 의학이 판단하는 방식이다. 크리스챤 사이언스의 경우 질병 치료에 있어 어떤 의료적 개입도 거부하며 오직 기도에만 의존한다. 물론 의사와 의료체계가 기도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기도가 다른 모든 의료적 조치를 받아들이고 난 후 부가적으로 이루어질 때만 그것이 허용된다. 크리스챤 사이언스는 의사의 치료 자체를 거부하며 기도로 치료를 시도한다. 따라서 크리스챤 사이언스의 행위는 기존 의료 권력에 대한 직접적 저항이자 도전으로 읽히기도 한다. 물론 의사의 맥락에서 크리스챤 사이언스의 방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과 같다(183). 의사는 자신을 과학적이고 합리적 위치에, 종교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여성을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 위치에 배치하며 가치 판단에 위계 질서를 부여한다(184). 의료적 가치 체계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종교적 여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학에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다(182).

비록 의학과 종교가 충돌하는 가치로 인식된다고 해도, 데스오텔스는 의학과 종교적 신념이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며 다른 식으로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테면 의료적 판단과 종교적 판단 모두 우리게에 가능한 많은 관점 중 하나(184-5)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강이란 개념은 많은 경우 의료적 검증을 통해서된 판단되고 승인되지만, 종교적 맥락에서 건강은 신체와 영혼의 행복한(well-being) 통합이다. 종교적 신념을 고려한다면 건강 개념 자체를 달리 사유할 수도 있다. 즉 종교적 신념은 부정되어야 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고려해야 하는 가치다. 이럴 때 죽음에 대한 사유도 달라질 수 있다. 만약 개인이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이 믿음 체계에서 죽음은 삶의 종식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행을 뜻한다(185). 이것은 넬슨의 논의가 얘기하지 않고 있는 지점이며 죽음을 좀 더 풍성하게 사유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2014/01/10 06:19 2014/01/10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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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1/09 2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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