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조치는 필요없다.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이 아니니까. 정신병을 폄훼하는 게 아니다. 젠더를 진단할 수 있다는 상상력 자체를 문제 삼겠다는 뜻이다. 젠더를 정신병으로 진단하겠다면, 트랜스젠더만이 아니라 비트랜스젠더 역시 진단해야 한다. 이 사람은 태어났을 때 지정받은 젠더로 살고 있는 정신병, 저 사람은 태어났을 때 지정받은 젠더로 살지 않고 있는 정신병... 그럼에도 처방전은 필요하다. 현재 의료 체계에서 적법하게 호르몬을 구하려면 처방전을 제출하는 방법 뿐이다. 정신과 진단서는 필요없지만 처방전은 필요하다는 얘기, 일견 모순 같을 수 있다. 의료 처방전을 필수조건/전제조건으로 인식하느냐,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도구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모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젠더가 의료 범주란 점 자체는 부정할 수 없지만(이것이 근대 젠더 체계의 토대란 점을 기억하자) 그럼에도 이런 체계를 받아들이느냐 바꾸려고 하느냐,라는 인식론적 차이가 있다. 다시 한 번 오해하지 말자. 정신과 진단서를 받는 사람은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이런 오독은 하지 말자. 젠더를 정신과 진단을 통한 관리 체계가 아니라 처방전으로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다. 이것은 일시적 협상안이다. 호르몬은 어떤 처방전 없이 임의로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면, 신분증 제출 없이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록하도록 하자. 딱 여기까지다. 이것이 최대치의 타협 지점이다. 호르몬을 투여할지 말지, 자신의 몸을 변형할 수 있는 약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온전히 자신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제 3자가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의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뜻이다. 그럼에도 현재 사회에선 어쨌거나 처방전이 필요하다. 아쉽게도 그렇다. 그렇다면 정신과 진단서 없이 본인의 진술을 믿으며(검사처럼 심문하고 재판관처럼 판단하지 않으며) 그 진술을 믿절미 삼아 처방전을 발급받을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그렇게 거창한 일도 아닌데, 이 일이 왜 이렇게 지난하게 느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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