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현상을 유비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ㄱ현상과 ㄴ현상은 비슷한 형태니까 같이 얘기할 수 있다고 논의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장애-퀴어 세미나를 하며 가장 어려운 지점은 장애와 퀴어의 연관성을 찾는 게 아니다. 장애와 퀴어의 유비 관계는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둘 다 이 사회의 비규범적 존재고, 추방되고 은폐된 타자며, 그러면서도 구성적 외부다. 한때 퀴어는 장애 범주로 분류된 적 있고, 장애인과 퀴어 모두 프릭으로 전시된 역사가 있다. 둘의 유비 관계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래서인지 초기에 읽은 많은 장애-퀴어 이론이 이렇게 유비를 밑절미 삼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단지 장애와 퀴어 만의 연관 고리가 아니다. 유비를 통해선 비규범적 범주 누구와도 연관 고리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유비 관계는 두 범주를 교차하며 사유함이 아니라 별개의 범주로 사유한다. 유비를 통한 접근은 둘의 교차 가능성이 아니라 둘의 분리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래서 유비로 사유하는 건 곤란하다. 유비로 사유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유비로 사유할 때 오히려 많은 걸 놓칠 수 있다.

그래서 장애-퀴어 이론을 어떻게 모색하고 기존 논의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물론 나는 아직 잘 모른다. 이 지점은 나보단 세미나의 다른 구성원이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어서.. 난 아직도 머뭇머뭇.. 워낙 배움이 느리고 고민이 얕아 그렇기도 하고...

유비하지 않는 사유, 동시적 경험/상호교차로 다시 사유하는 작업은 트랜스젠더 논의에서도 중요하다. 기존 논의에서, 퀴어 이론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이론에서 트랜스젠더는 누락된다. 퀴어 이론은 많은 경우 성적 지향을 밑절미 삼는, 성적지향 이론으로 얘기되고 그리하여 동성애(!, 여기서 또 한 번 얼마나 많은 누락과 배제가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 이론의 다른 명칭으로 유통된다. 그러면서도 퀴어 이론은 트랜스젠더의 몸 혹은 젠더퀴어의 몸을 그 상징성으로 재현한다. 트랜스젠더 몸은 퀴어 이론의 상징으로 전유되는 동시에 퀴어 이론에서 추방된다. 페미니즘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페미니즘 논의는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이해하는 젠더를 토대 삼고, 트랜스젠더를 별개의 범주로 논한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는 젠더 구성을 가장 잘 입증하는 증거가 되거나 기존 젠더 규범을 옹호하는 수호자가 될 뿐이다. 이런 배경에서 퀴어 이론과 페미니즘에서 트랜스젠더가 빠져 있다는 지적은 무척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과하게 말해서, 누락되었다는 지적은 딱 그 찰나에만 의미있다. 누락되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저 포함하면 될 것인가? 기존 논의를 아예 재구성할 것인가? 재구성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저 포함되기 위해 누락과 배제를 얘기하지 않는다. 포함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존 인식론의 한계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 누락과 배제를 얘기한다. 그렇다면 어떤 찰나에서 재구성할 수 있을까?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재구성할 지점이 없어서가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에선, 트랜스젠더-‘퀴어’ 이론-‘페미니즘’은 이미 붙어있다. 그래서 같이 얘기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나는 mtf 트랜스젠더고 퀴어고 페미니스트다. 이런 나의 경험에서 트랜스젠더를 얘기하는 작업은 곧 퀴어 이론을 얘기하는 작업인 동시에 페미니즘을 얘기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이를 누군가에게 하나하나 설명하기란 무척 어렵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어렵다. 나에겐 당연한 지점을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물론 이 작업은 기존 논의를 재구성하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작업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그럼에도 매우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다. 기존 논의를 재구성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동시에 재구성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쾌락이 발생한다!)

이것이 또 어려운 이유는 아무리 설명해도 상대방이 못 알아듣거나, 알아들을 의지가 없다는 데 있다. 이것은 자신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작업이란 점에서 한 순간의 지적 쾌락으론 받아들일 순 있어도 지속적 토대로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나라고 다르냐면, 나 역시 내 토대를 흔드는 작업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내 사유의 토대로 받아들이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 지난함은 많은 경우 새로운 논의를 제안하는 사람을 지치도록 하고, 또 논의를 발전시키는데 방해 요인이 된다. 논의에 단계가 있다면, 나는 5나 7을 얘기하고 싶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1도 간신히 이해할 때 깊이 있는 논의를 전개하는 데 무리가 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하다.)

암튼... 그래서... 아... 뭐라고 마무리 하지? ㅠㅠ

2013/06/24 06:30 2013/06/2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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