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말했다, 밀당은 관계에 긴장감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그래서 밀당은 꼭 필요하다고. 그냥 그 사람은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나의 경우는 아니다. 밀당만큼 피곤한 일도 없으니까. 좋은 얘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밀당을 왜 할까 싶다.

어떤 관계에서건 밀당을 시도하면, 난 밀당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편이다. 그냥 그 관계에서 벗어날 궁리를 한다. 밀당을 하는데 드는 피곤함이 싫기 때문이다. 그 피곤함은 좋은 감정을 손상시키고 그래서 관계를 단축시키는 이유가 될 때도 있다. 그러니 상대방에겐 긴장감일지 몰라도 내겐 그냥 피곤함이다.

고양이와 살며 배운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비단 고양이 뿐이랴. 동반종과 함께 살면 배울 수 있는 귀한 경험이다(문조는 제외? 크). 내가 사랑을 주면 그냥 그만큼 받아들인다. 여기에 이해득실을 따지는 반응 같은 것 없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다. 그래서 그냥 믿는 것, 이것이 좋다.

언젠가 안철수의 화법이라고 설명한 글을 읽은 적 있다. 서울시장 출마 여부로 한창 시끄럽던 시기에 인터넷 게시판에서 우연히 읽었다. 정치공학의 맥락에서 ㄱ이란 말은 ㄴ 혹은 ㄷ을 뜻하겠지만 안철수에겐 말 그대로 ㄱ이라고 했던가. 안철수는 ‘출마를 고민 중이다’고 했고 기자는 ‘출마 예정’이라고 해석했다. 안철수의 지인은, ‘말 그대로 출마를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다’라고 번역했다. 그냥 이런 게 편하지 않나? 내가 인간관계를 너무 단순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이런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투명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냥 이런 투명함으로 관계를 맺는 게 편하지 않나? 편해야 오래 갈 수 있는 거고.

혹은.. 어느 영화였더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대사가 나온 영화가... 그래. 사랑의 감정이건 다른 어떤 감정이건 더 사랑하거나 더 헌신하는 사람이 관계에서 취약해지는 면이 없다고 할 순 없겠지.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이용한다면 이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때때로 밀당은 이런 감정의 불균형을 밑절미 삼아 일어나는 위험한/윤리적이지 않은 행동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부터 사람 감정으로 장난치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내가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고양이 나이 세 살인 바람의 칭얼거림이 늘었다. 무슨 이유일까? 아, 이건 밀당보다 더 어렵다. 끄응... 그저 칭얼거림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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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기 전에 대답을 해야지..

2013/04/17 06:13 2013/04/17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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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3/04/17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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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인  2013/04/17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맞아요. 그 영화였어요. 고마워요. :)

      취약함을 민감성이나 개방성으로 해석한다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저 역시 그렇게 믿고요. 그래서 관계에선 누가 덜 취약하고 더 취약한지엔 좀 의문이기도 해요. 어쩌면 취약해지지 않으려고 애쓸 수록 자신의 취약성을 더 생생하게 드러내는 듯도 하고요.
      아마도 제 글에서 취약성은 정희진 선생님의 칼럼에 나타난 시간성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싶어요. 아닐 수도 있지만요.. 아하하 ;;;;;;;;;;;;;;;;;;;;;;;;;;;;;;;;;;;;;;;;;;;

      그리고.. 답글은 공개글이라 많은 걸 가려가며 써야 하네요.. 하하. ;;
      전 비공개 님의 태도가 아니라 제 태도가 고민이에요. 비공개 님의 걱정은, 적어도 제 입장에선 괜한 것이고요. 물론 앞으론 서로의 고민으로 남겠지만요.
      뭐랄까.. 전 일종의 제안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그 제안이 기뻤고 또 한편 고마웠고요. 그러니 그냥 표현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망설이기보다 그냥 표현해주시길 바라고요. 어디까지나 비공개 님이 원하시는 방향에서요.
      이야기가 겉돌 수밖에 없겠어요. 만나서 얘기해요. :)

      +저도 동생이 필요하나..라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고 있어요.. 흐흐흐
  2. 혜진  2013/04/17 1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순하고 솔직한게 최고죠! :)
  3. jane  2013/04/18 1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저도 밀당은 싫어요. 뭔가 낭만적이지가 않다, 라는 이유지만요.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라지만 뭐 어쩌겠어요. 사랑하는 마음도, 슬퍼하는 마음도 오롯이 제 것이니까. 전 그냥 제가 좋아하는 만큼 묵묵히 사랑을 주는 게 참 좋더라고요.
    • 루인  2013/04/19 0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흐흐. 밀당이 뭔가 낭만적이지 않다는 말, 좋은데요? 읽는 순간, 딱 이거다 싶기도 해요. 흐흐흐.
      그쵸? 그냥 좋아하면 그런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만큼 묵묵히 주는 게 정말 좋은데요. :)
  4. 비밀방문자  2013/04/19 1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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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인  2013/04/20 0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게 미스터리죠. 전 밀당을 하지 않는데 몇몇은 제가 밀당을 한다고 얘기하니까요.. 어떤 지점이 이런 차이를 야기하나 궁금하달까요.. 흐흐.
      (아.. 심각하게 대답하고 싶다.. 크크크크크. 아니 ㄹㅅ님께 이상한 방식으로 투고하고 싶네요.. 케케케)
  5. yno  2013/04/19 1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 어떻게 밀당이 '실체화'되었는지 궁금해지네요. ..
    • 루인  2013/04/20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경험을 질문하신 거라면, 그런 건 아니고요.. ^^:
      최근 고민 중 하나가, 밀당이 이성애규범적 연애의 한 가지 방식이 아닐까라는 고민이 들더라고요. 밀당하는 것 자체가 이성애 각본의 일부고 이것이 연애를 구성하는 한 방식이고.. 뭐, 깊이 있는 고민은 아니고 그냥 이런 혐의 같은 것이 들었거든요.. 흐흐.
  6. 프랄린  2013/04/19 1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흐음...카카의 칭얼거림 역시 커졌답니다...게다가 목소리마저도 커져서 가끔 놀라기도 한답니다.
    뒤늦게 질풍노도의 시기가 온 것일까요...
    • 루인  2013/04/20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카 마저도... oTL
      카카는 좀 의연하고 점잖을 줄 알았는데요.. 흑.
      다들 비슷한 시기에 질풍노도를 겪는 걸까요... ;ㅅ;
  7. 비밀방문자  2013/04/20 0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루인  2013/04/21 08:0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 흔적인데요.. :)
      나중에 다시 보면 또 다른 방식으로 재밌지 않을까요? 흐흐.

      밀당의 이성애규범성은 정말 단편적 아이디어 수준이라 좀 천천히 고민해보려고요. 헤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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