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며칠 전 어느 포럼 혹은 토론회 자리에서 꽤나 재밌는(?) 일이 있었다. 사실 그 일로 적잖은 사람이 상처 받았을 듯한데...

어떤 사람이 성적소수자의 어려움을 말했고, 그로 인해 논의가 촉발됐다. 근데 그는 성적소수자의 어려움을 논하려는 이에게 당신이 성적소수자냐고, 성적지향이 뭐냐고 대놓고 물었고, 곧 이건 아웃팅이죠,라며 냉소했다.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었고 적잖은 사람이 그의 말에 화를 냈지만 누구도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성적소수자 이슈는 성적소수자만 말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였고, 그렇잖아도 민감하다고 불리는 이슈 중 하나인 성적소주자 이슈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토론하기 힘든 이슈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LGBT나 퀴어 등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이가 없었느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상당히 많았음에도 그는 마치 자신만이 성적소수자인냥 말했다. 할 말이 너무 많았고, 행사가 끝날 즈음에야 간단하게 나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서 말은 안 했지만, 난 그가 일 년 뒤에도 그렇게 말할까 궁금했다. 모두는 아니지만 적잖은 사람이 당사자주의에 경도될 때가 있으니(나 역시 그랬고), 지금이 그런 시기라고 믿고 싶다. 진화론적 변화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당사자주의의 문제를 인식하고 태도가 변할 거라는 기대.


02
그 자리에서 든 많은 고민 중엔 누군가가 당사자주의를 고집하고,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 당사자이길 요구할 때, 소위 말하는 당사자가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였다. 너무 강하게 당사자주의를 요구할 때, 그 당사자 범주에 속하는 이는 말하기 싫어진다. 하지만 주변에선 당사자에 해당하는 이가 말하길 기대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LGBT/퀴어 이슈가 아닌 다른 이슈에선 해당 운동에 속하는 이가 말해주길 바란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내가 말하는 게 참 부담스러웠고, 망설여졌다. 그가 요구한 당사자주의에 말리는 것만 같아서.


03
요즘 고민 중 하나는, '어떤 범주의 이슈는 해당 범주에 속하는 이들만 말할 수 있다면(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이슈는 트랜스젠더만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운동을 왜 할까?'다. 당사자가 말하면 비당사자는 얌전히 듣고만 있길 바란다면, 당사자의 말에 누구도 반론할 수 없는 권위를 부여한다면 운동이 왜 필요할까? 이런 상태는 운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혼자 떠드는 것과 같으니까. 그냥 웹에 블로그나 트위터 계정 만들어서 혼자 열심히 떠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단상이지만.. 이번의 논란이 내게 당사자주의와 운동/활동을 다시 고민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2010/07/04 10:00 2010/07/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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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0/07/04 1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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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인  2010/07/05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아요, 맞아요. 소위 말하는 위계질서를 만드는 것도 정말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일이에요. 피해자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닌데 꼭 누가 더 힘든가로, 더 많은 차별을 경험하는가로 위계서열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걸 듣노라면 난감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근데... 비공개글인데 이름을 왜...???
  2. 비밀방문자  2010/07/06 14: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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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인  2010/07/08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역시 마지막 문장이 핵심인가..했다죠.. 아하하;;

      전 어떤 의미에서 정체성정치와 당사자주의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고민해요. 그래서 자주 붙여 쓴달까요... 특정 경험을 공유한다면 공유하는 경험을 중심으로 운동할 수도 있는데 그 경험이 절대권을 획득할 때면 너무도 불편하달까요.. 물론 다른 운동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지만, 저라고 어떤 뚜렷한 대안이 있는 건 아니지만요..
      아무려나 범주/정체성이 아닌, 혹은 범주/정체성에 바탕을 둬도 그것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 방식의 운동을 상상할 수 있길 바랄 뿐이에요..
  3. 비밀방문자  2010/07/13 0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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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인  2010/07/16 2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억압구조가 워낙 견고하고 개개인이 일상으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아울러 구조를 얘기하기엔 종종 막연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라 당사자주의를 얘기하기 쉬운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당사자주의가 일단은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는 방법이기는 하니까요. 문제는 당사자주의의 문제를 지적하는 말들이, 당사자주의의 편리함보다 얼마나 더 설득력이 있을까가 아닐까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당사자주의가 반복될 거 같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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