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한 편을 읽고 발제하기로 했다. 읽어야 하는 논문은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를 분석하고 있어서, 영화를 먼저 봐야했다. 10년도 더 전에 개봉한 영화란 걸 이제야 알았다.

이 영화가 유명하다는 건 알았지만, 내용은 전혀 몰랐다. 오늘 오전에 봤으니 오늘 처음 알았다. 강박증이 있는 로맨스 소설가(“이성애-비장애-백인-남성”) 우달, 천식인 아들을 돌보며 식당 종업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코넬리(“이성애-비장애-백인-여성”), 화가이자 우달의 이웃에 사는 비숍(“게이-비/장애-백인-남성”)이 주요 등장 인물이다. 괄호에 표시한 범주는 지금 읽고 있는 논문의 분석틀이라 표시한 것. 비숍은 게이-비장애-백인-남성에서 사고로 게이-장애-백인-남성으로 사회적 범주가 변한다. 논문은 장애 연구와 퀴어 이론의 접점을 이 영화를 분석하며 풀어가고 있다. 이 글에서 내가 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 관련 논의는 생략.

위 세 등장인물 중에서 나는 누구에게 가장 이입했을까? 게이지만 어쨌든 비이성애자니 비숍에게? 아님 이성애자인 것 같지만 식당에서 노동하는 코넬리에게? 설마 인종차별발언, 성차별발언, 장애차별발언을 일삼고, 아웃팅은 기본이며 식당에서 종업원을 괴롭히는 우달에게?

현재 알바를 하다보니, 손님으로 가게엘 가도 알바나 점원에게 이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점원을 괴롭히거나 과하게 행동하는 손님에겐 속으로 내가 더 화내기도 한다. 며칠 전엔 한 시간 동안 날 괴롭힌 손님이 있어 완전 분노하기도 했다. ‘물건’을 계산해 달라고 하고선, 계산하고 있는데 새로운 ‘물건’을 추가하는 건 그럴 수도 있고 이런 경우야 빈번하니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계산을 대여섯 번을 했다는 것(최초 계산 요청 후 ‘물건’을 추가하는 일을 하나의 단위로 했을 때, 대여섯 번;;). 아울러 포장하고 있는데 ‘물건’을 추가해서 바로 계산해달라고 하고, 다시 계산하고 포장하는데, 몇 가지 ‘물건’을 빼는 건 기본. 나중엔 ‘물건’을 포장하고 있는데,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빼달라고 독촉하더라는. ㅡ_ㅡ;; 뭐, 이건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다른 손님도 있는데 다른 손님은 완전히 무시하고, 계산하고 있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빼달라고 독촉하는 건 무슨 경우람.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직접 빼는 과정에서 다른 ‘물건’을 떨어뜨린 일도 있었다. 근데 그는 그 ‘물건’들을 줍지 않았다. 이런 일은 당연히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는 태도로,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덧붙이면 그는 ‘물건’을 아무렇게 대했다. 막 던지는 식이었다. 이게 나의 분노를 폭발시킨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일을 한 시간 동안 겪었다. 더 무서운 건, 나는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며칠 뒤 가게를 다시 찾은 그는 나와 매우 친한 것처럼 행동하더라는. 일종의 공포였다. 점원의 입장에서 가장 꼴사나운 손님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점원에게도 과시하며 그 지위에 맞는 대우를 요구할 때다. 자기가 교수면 학교에서나 교수지 가게에서도 교순가? 글고 교수가 뭐 벼슬이고 지위냐? 암튼 … 흥분을 가라앉히고. 흠, 흠.

나는 등장인물 중에서 누구에게 이입했을까? 이미 예상했겠지만, 우달이다. -_- 그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종업원 괴롭히기는 기본이며 민폐는 필수 옵션인 인간이다. 그런데 그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단 하나다. 영화 초반에 그는 문을 잠그면서 잠궜다가 열기를 반복하며 “하나, 둘, 셋, 넷, 다섯”을 센다. 즉, 다섯 번에 걸친 행동으로 문을 잠근다. 불을 켤 때도 마찬가지다.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다섯 번째 켠다. 나, 이 장면에서 우달에게 이입했다. 우달이 금을 절대 밟지 않고 걷는 장면에선 너무 공감했다. 아하하. 인정하지 않지만 나, 강박증이다. 물론 우달과 같은 방식은 아니다. 금을 밟지 않고 걷는 것과 같은 식의 강박은 아니고 다른 식의 강박이 있다. 아무려나 그의 행동에 나의 어떤 행동이 곧장 떠올랐고, 그 이후론 그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 호모포비아 발언까지도! 내가 나이들면 우달과 같을까 싶었다. 물론 이 영화, 본격 분석하면 비판할 거리가 너무 많다. 그런데 강박증인 주인공 때문에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달까. 아하하;;; 다른 사람에겐 어처구니 없고, 이상하기만 한 어떤 행동이 자신에겐 너무도 중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하루 일정이 꼬이고, 하루 종일 찝찝하고 불쾌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나의 이입은 때로, 누가 누구와 공감하는가를 알려주는 흥미로울 수 있는 사례기도 하다. 모든 트랜스/퀴어들이 서로에게 공감하는 건 아니다. 소설이건 영화건, 등장인물이 자신과 동일하다고 여기는 범주의 인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에게 공감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사고가 나기 전까진 돈 많고 잘 나가는 비숍에게 나는 무엇을 공감할 수 있겠는가. 그가 게이가 아니라 레즈비언 트랜스젠더여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어떤 정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느냐의 문제기도 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느낀, 혹은 내가 밀착해서 떨어질 수 없었던 정치는 강박증이었다. 적어도 내겐 강박증이 트랜스라는 범주, 비이성애자라는 범주 만큼의 중요한 정치적 이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박증은 다른 여타의 비규범적인 행동만큼이나 기이하고 이상한 행동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행동양식과 관련 있는 중요한 이슈기도 하다.

암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를 뒤늦게 보며, 도저히 내가 좋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인물에게 공감하고 그를 변호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뭔가 재밌었다. 현실에서 비숍과 같은 인물을 손님으로 만난다면? 강박증이건 뭐건 그는 최악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의 감정이 재밌었다. 하하.
2009/09/29 22:30 2009/09/29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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