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태원과 트랜스젠더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작업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낯선 조합은 아니니까요. 이태원에 트랜스젠더가 많다는 식의 언설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예전부터 하고 싶은 주제였으니까요. 그래서 인터뷰를 조금 하고 이것저것 찾으면 쉬울 거라고 믿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예단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선, 현재 한국에서 이태원과 트랜스젠더란 키워드로 생산된 글이 거의 없다는 어려움이 발생했습니다. 아울러 이태원과 관련 있는 글 중에서 도움을 받을 만한 글 자체가 매우 적다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이태원과 관련 있는 대부분의 글은 관광특구란 키워드거나 이색적이고 이국적인 공간으로 소개하는 정도입니다. 자세히 분석한 글이 매우 적다는 걸, 작업을 시작한 이후에야 깨달았습니다. 이걸 깨닫고 나니 암담하더군요. (혹시 이태원과 트랜스젠더를 주제로 하는 글을 알고 있으신 분, 제보부탁!)

제가 글을 쓰는 습관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블로깅과 같은 종류의 글쓰기는 약간의 아이디어만으로 시작합니다. 계획을 세워야 소용없고,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글이 나오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냥 첫 문장만으로 시작하면 글은 알아서 흘러가더라고요. 그래서 글은 머리로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쓴다는 신념 비슷한 게 있습니다. 얼마 전엔 꽤나 흥미로운 아이디어/소재가 있었는데, 머리로는 아무리 굴려도 이야기 전개가 안 되더라고요. 항상 서두에서 막혔습니다. 그래서 일단 손으로 쓰기 시작했더니, 저도 예상하지 못 한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글쓰기란 그런 거죠. 펜을 잡는 것도, 키워드를 두드리는 것도 손이라면, 글쓰기의 뇌는 손가락 끝에 있는 게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소위 학술적 글쓰기라는 걸 한다면, 전 일단 참고문헌을 찾습니다. 제 관심주제, 쓰고자 하는 글의 주제와 관련 있는 논문들, 책들, 자료들을 찾아서 읽고 정리하길 반복합니다. 그렇게 일정한 분량이 모이면, 그때서야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저 자신의 문제의식이 명확하지 않을 땐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정리하고, 짧으나마 제 아이디어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문제의식이 분명해지니까요. 아울러 기존의 논의와 저의 입장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지형도를 그릴 필요도 있고요. 이렇게 모은 자료와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배치해서 한 편의 글을 완성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편집자'로서의 역할을 좋아하는 건지도 몰라요.

이태원과 트랜스젠더란 키워드는 후자의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습니다(첫 문장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니까요). 현재 이태원에서 살고 있는 트랜스젠더들의 삶과 관련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선 역사 정리가 우선이었습니다. 이태원이란 공간도, 트랜스젠더란 존재도 2009년에 뜬금없이 나타난 게 아니니까요. 매우 긴 역사 속에서, 현재의 맥락이 발생하니까요. 그것이 일관성 있는 흐름이건, 단절적 흐름이건 상관없어요. 맥락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단적인 예로, 현재의 이태원을 단순히 이국적인 유흥공간으로 설명하는 건 무척 위험하죠. 이태원은 미8군 용산기지 인근에 위치한 기지촌이니까요. 기지촌이라는 성격을 빼고 이태원을 논하는 건, 일부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많은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이태원이 기지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시작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대중가요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미8군이 용산에 있으며, 이태원 근처라는 사실 자체를 몰랐죠. 하긴, 10년을 살았던 동네의 옆 동네 이름도 모르는 인간이니, 당연한 걸까요? ;;;

암튼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료가 없더군요. 몇 가지가 문제였습니다. 기지촌 관련 글 자체가 많은 게 아니란 것, 이태원을 다루는 글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루는 글은 더더욱 드물다는 것(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루는 글의 상당수는 아는 사람들의 글이라는 것;;). 각각의 자료도 드문데, 이 모두를 조합하니…. *애도*

그렇다고 포기할 제가 아니지요. 직접 관련 있는 자료가 없다면 우회하는 수밖에 없죠. 옛날 책들을 무작정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200~300쪽의 책에서 "게이", "동성애", "성전환", "이태원"과 같은 단어가 단 하나라도 나오길 바라면서요. 나오면 다행이고 안 나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어차피 흔적을 찾으려는 거니까요. 일례로, 1920년대 신문기사에서 "성전환"이란 단어를 찾았을 때 너무도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흔적 찾기란 그런 거죠. 찾는 자료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아도 뭔가를 상상할 수 있는 구체적인 토대를 찾는 거니까요.

이렇게 자료를 찾다보니, 봐야 할 자료는 방대한데, 제가 아는 지식은 일천하다는 걸 깨달았죠. 아울러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요. 그 자료를 모두 뒤적여서 필요한 자료를 하나도 못 찾는다면, 괜히 억울하니까요. 시간제약이 없다면 괜찮지만 지금은 촉박하거든요.

암튼 이제 글을 써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얼 써야 할까요? 저는 여전히 헤매고 있습니다. 그저 이태원과 트랜스젠더란 주제로 한 권의 책을 쓴다면, 이번 글은 서론을 겸한 1장에 들어갈 내용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아울러 흔적 추적하기의 서론 격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욕심 다 버리고 이 정도만 하려고 했는데, 이 역시 과분한 욕심이네요. 걱정만 많고 하는 일은 없는 요즘입니다.

어쨌든 이번 일로 깨달은 것 하나. 저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도서관에서 옛날 책을 뒤적이는 걸 좋아하는 거죠. 대인기피 경향이 있으면서 지역연구를 한다는 건, 참 …. 뭐, 나름 즐거운 일이긴 합니다. ;;

2009/09/04 10:55 2009/09/0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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