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만 여럿이고 아들이 없는 가족을 상상하자. 그 가족이 사는 사회에서 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사냥을 도울 아들이 필요하다. 마침내, 아이가 새로 태어났지만 딸이었다. 부모는 사냥꾼이 필요했기에, 그 아이를 아들로 키우기로 결정했다. 그 아이가 5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그 아이가 임신을 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그 아이는 소년으로 옷을 입었고, 남자들의 기술을 배웠고, 실제로 매우 튼튼하게 자랐고, 훌륭한 사냥꾼이 되었다.
아들이 있는 또 다른 가족을 상상하자. 그 아이는 여자들의 일에 관심을 보였고, 남자들의 일은 피했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시험하기로 했다. 그들은 작은 울타리에 아들을 데려갔고, 활과 화살, 그리고 바느질 도구가 든 바구니를 넣어줬다. 부모든 울타리에 불을 질렀고, 아들이 무엇을 챙겨 탈출하는지 지켜봤다. 그 아이는 바느질 도구를 챙겼고, 그때부터 그 아이는 딸이 되었다.
-Kessler and McKenna. “Cross-Cultural Perspectives on Gender.”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21.

위의 문장은 케슬러와 맥켄나(맥케나/맥키나?)가 함께 쓴 책의 일부다. (정확한 번역은 아니고 대충 얼버무린 번역. -_-;;) 미국 인디언 원주민들 중엔 버다치(berdache)로 불렸던, 지금은 두 영혼의 사람들(two-spirit people)로 불리는 또 다른 젠더가 존재했다고 한다. 위에 날림으로 번역한 내용은 두 영혼의 사람들의 일화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인디언 문화를 조사한 인류학자들이 남긴 기록의 일부다.

1978년에 이 책을 쓴 케슬러와 맥켄나의 주장에 따르면, 현존하는 인류학지 중에서 두 영혼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사실상 없다고 한다). 대부분이 옆 부족에 두 영혼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는 식의 얘기를 전하고 있단다. 암튼 그렇게 기록에 남은 두 영혼의 사람들과 관련한 위의 일화는 젠더를 다르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물론 위의 두 사례는, “어쨌든 결국 남자 아니면 여자로 구분하고 있는 것 아니냐”란 반응을 끌어내기 쉽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중심으로 이해했을 때, 현대의 통상적인 젠더 개념으로 이해했을 때, 이렇게 이해할 여지는 상당하다. 그럼에도 이 두 사례가 말하는 젠더 개념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접하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선, 위의 두 사례는 모두 젠더를 소위 “생물학적 본질로 불리는 몸”에 고착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여기서 젠더는 개인이 어떤 역할을 선호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비록 태어날 땐 생물학 혹은 몸의 외부 형태로 젠더를 결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변화에 유연해서 여성과 남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개인을 둘 중 하나로 설명한다 해도 이분법이라고 단언할 수 없게 한다. 이 유연함은 개인의 젠더를 둘 중 하나로 인식하지 않거나, 인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듯하다. 혹은 그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슈는 아니라고 여겼거나.

물론 이 두 사례로 인디언 부족들 각각의 젠더 개념을 유추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인디언 부족의 젠더 개념을 이분법의 틀로 이해한다면, 그런 이해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이해다.

그런데 …. 사실 첫 번째 사례를 읽으며, 뭔가 운이 좋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새로 태어난 아이가 사냥꾼이 되기 싫었다면 꽤나 괴로웠을 테니까. 부모는 사냥꾼이 되길 강요하는데, 아이는 바느질을 하고 싶어 했다면 부모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사례에서, 딸이고 싶지만 활과 화살을 좋아한다면 얘기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선 그 아이는, 아마 매우 똑똑했을 테니, 시험에선 선택하기 어려웠을 거 같다. 바느질 도구를 선택하면 딸로는 살 수 있지만 활과 화살을 사용할 수 없을 테고, 활과 화살을 선택하면 사냥은 할 수 있겠지만 딸로는 살 수 없을 테고. 어쩌면 그냥 빈손으로 탈출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인디언 부족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특정 문화적 기호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분명 현대 사회의 대처 방법과는 달랐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쉽지만 이 역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2009/06/18 13:56 2009/06/1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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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케슬러와 맥켄나의 『젠더』: 1970년대 젠더 이론을 추적하기 Tracked from Run To 루인 2009/07/12 15:17  delete
  1. 지구인  2009/06/18 15: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센터가 초청했던 월터 윌리암스 교수가 버다치 관련 책을 쓴 전문가였어요. 그리고 버디에 버다치 사진이 실린 적도 있는데.. (존경받는 인디언부족의 어른으로) 실제로 인터뷰한 적이 없다는 말은 78년도 책이라서 그런 걸까요? 여튼.. 저런 성별결정방법은 흥미롭지만 또한 동시에 왜 바느질과 활이여야 하느냐는 문제도 있죠.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보면 사회의 기능이 즉 아들과 딸의 구분 자체가 바느질과 활.. 사냥과 집안일 이렇게 나뉘어져있고 그것을 부르는 방식이 딸과 아들이라면 사실 별 상관없을 수도 있다 싶네요. 더 중요한 건 그러니까, 활을 선택하고 그래서 아들로 불리는데.. 그 아들로 불리는 그 사람이 다른 아들을 사랑할 수 있다면... 뭔가 복잡해지는데.. 사실 삶의 방식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처럼 복잡하지 않다면 또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있겠지요.; 우린 너무 복잡하잖아요.
    • 루인  2009/06/20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쵸? 제가 지금까지 읽은 글은 두 영혼의 사람들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위의 글이 조금 놀라웠어요. 그래서 쓰기가 조심스럽기도 했고요.
      근데 케슬러와 맥켄나가 제기하는 문제는 조금 다른 부분이더라고요. 이성애-젠더이분법을 만고의 진리로 인식하고 있는 서구의 인류학자들이 인디언의 젠더를 무시하고 접근하면서 두 영혼의 사람들을 특이한 존재로 부각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두 영혼의 사람들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분법의 입장에선 두 영혼의 사람들이 이상하니 '카더라 통신'까지 덧붙여 기술한 것일 수도 있다면서요.
      케슬러와 맥켄나의 전반적인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활과 바느질 구분의 이분법은 놓치고 있는데요. 저자들의 문제의식을 활과 바느질도구에 적용하면 좀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더라고요. 케슬러와 맥켄나는 인디언들이 종종 인류학자가 원하는 대답을 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어요. 사실 이건 요즘도 그렇잖아요. 어느 기자가 트랜스젠더의 삶을 인터뷰하겠다고 하면, 고통을 재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고통을 전시할 때까지 계속 질문하고, 그러다보면 나중엔 짜증나고 귀찮아서 기자에게 고통을 재현해주기도 하잖아요. 활과 바느질도구란 이분법 역시 이럴 수도 있겠더라고요. 사실은 활과 바느질도구란 이분법의 의식이 없었는데, 인류학자들이 계속해서 이분법으로 나눈 설명을 요구하니까, 일종의 쇼를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혹은 활과 바느질도구가 성별이분법으로 의미를 달리하는 도구가 아닌데, 인류학자들이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고요. 어디까지나 저의 추측이지만요. 흐흐흐.
      그나저나 우리 사회는 정말이지 너무 복잡해요.. ;ㅁ;
  2. 혜진  2009/06/19 0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궁금하네요. 빈 손으로 탈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활과 화살을 들고 탈출해서 아들로 키웠는데 나중에 다른집 아들을 사랑한다고 하면 어떻게 대처했을까요...흠흠
    • 루인  2009/06/20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나 추측이지만, 신경을 안 쓰지 않았을 거 같기도 해요. 왠지 그랬을 거 같아요... 흐흐
  3. 벨로  2009/06/19 0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느질 도구보다 활과 화살 챙겨나왔을 딸 여기 있어요. ㅋㅋㅋ
    좀 이분법적이지만 어쨌든 트랜스젠더를 인정하는 사회인 것은 좋네요. 두 영혼의 사람들이란 말도 멋있고요.
    • 루인  2009/06/20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두 영혼의 사람들이란 표현은 현대에 만든 것이더라고요. 예전엔 버다치란 말을 사용했는데, 이게 식민주의 표현이라고 많은 비판이 있어서 두 영혼의 사람들이란 표현을 사용하더라고요.
      전 아마 그냥 빈 손으로 나오지 않을까 해요. 흐흐흐
  4. 페리  2009/06/19 1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디언 부족이면 .... 그냥 춤추고 놀았을것 같은데요.... ^.^
  5. 혜진  2009/06/24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긴...그냥 신경쓰지 않았을 듯 해요.
    인생에 그거 말고도 신경쓸데 많다는 식으로 ㅎㅎ
    • 루인  2009/06/25 1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흐흐. 그렇겠죠? 아마 걱정거리가 지금 우리네와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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