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기. 『사랑과 性에 관한 보고서』. 서울: 고려원, 1995.

01
정말 우연이었다. 얼추 열흘 전, 그냥 새로 들어온 책이 뭐가 있나 싶어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사랑과 性에 관한 보고서』란 제목을 발견했다. 새로운 제목은 아니다. 1990년도 소설 중엔 ‘~보고서’란 식의 제목이 종종 있으니까. 어떤 내용인지 확인할 겸 해서 책을 꺼냈다. 그리고 책 뒷장에 적힌 소개글을 읽었다.

자궁을 가진 남자, 페니스를 가진 여자,
제 3의 性을 가진 그들이 설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어…?!?!?!?! 설마 하며 서문을 찾았다.

한 젊은 남자와 우연히 병원에 카페테리아에서 마주앉았다. 흰 와이셔츠에 카키색 반바지를 단정하게 입은 그는 조각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중략…]
이튿날 남자가 아기를 안고 아내와 함께 퇴원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남자의 아내는 방금 아기를 낳은 산모로 볼 수 없을 만큼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황홀만 미모의 부부를 바라보는 내 옆에서 누군가가 소곤거렸다. 여자는 전남편의 아기를 낳은 거야. 믿을 수 있겠어?
그날 내가 얻어낸 정보들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금 남편과는 아기를 낳을 수 없어 전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는 여자는 이왕이면 친 동기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양쪽 남자의 동의와 후원으로 인공수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불임인 이유가 나를 경악케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받은 남자였다. 모르고 볼 때는 전혀 의심이 안 가는 완전한 남자였건만.
[…중략…]
1995년 7월 뉴욕에서
임혜기

몇 가지 이유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이 1995년에 나왔다는 것, ftm/트랜스남성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번역 소설이 아니란 점! 이 책을 사지 않을 수 없었고, 곧장 읽었다. (지난주에 읽고 독후감은 이제 쓴다는;;)

02
작품의 내용을 살피는데 저자의 이력을 반드시 들먹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저자의 이력이나 역사를 안다면 작품의 내용을 좀 더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이, 임혜기가 ftm이란 뜻은 아니다. 임혜기가 1980년대부터 미국에 이주해서 살았으며, 이 책이 1990년대 중반에 나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은 미국에서 트랜스젠더 운동이 상당한 파급력을 지니고 등장한 시기다. 이론의 발달, 운동의 증가, 개인의 '가시화'가 활발했다. 임혜기가 1990년대 중반, ftm/트랜스남성과 관련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소설에선 ftm/트랜스남성의 수술 방법, 부치와 ftm의 구분 등을 심심찮게 언급하는데 이런 논의 자체가 미국 논의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1990년대 한국소설이 이 정도의 논의까지 다뤘단 말야, 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 놀라움, 1990년대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논의에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여실히 반영한다. 혹은 그 시대에 대한 나의 무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잊혀진 작품을 (재)발견한 기쁨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무척 만족스럽냐면, 그렇진 않다. 이 소설은 ftm/트랜스남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적잖은 부분이 놀랍지만,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 전체 분량으로 따지만 ftm/트랜스남성과 관련한 내용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아울러 ftm/트랜스남성인 세욱이, 자신과 결혼한 진주에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는 장면은 어물쩍 넘어간다. 내가 가장 기대한 장면은, 트랜스젠더인 걸 결혼 후에 밝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얘기를 할까 인데, 작가는 이 장면을 암시만 할 뿐이다. 읽기에 따라선 세욱이 주인공이 아니라 세욱과 결혼한 진주가 주인공 같다. 저자의 한계는 명백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다. 그중 일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길어서 more/less 기능으로;;)

읽기..



03
소설 뒤엔 문학평론가라는 김미현의 해설이 실려 있다. 해설을 잘 안 읽는 나지만, 이 소설의 해설은 읽지 않을 수 없다. 근데 이 해설이 대박이다. -_-;; 말이 필요없다. 그냥 확인하자.

임혜기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사랑과 性에 관한 보고서》는 충격적인 성에 대해 과격하게 말하는 소설이다. 그렇게 말하기를 선택한 소설이다. 임혜기는 이 소설에서 「제3의 성」에 대해 말한다. 시몬느 드 보봐르에 의하면 남성에 비해 부차적이고 종속적이며 타자화된 여성은 「제2의 성」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의 소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제1의 성도 아니고 제2의 성도 아니기에 이중적으로 고통받는 제3의 성을 소유한 소수집단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게이나 레즈비언, 성전환자들이다. 그들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다. 그 둘 모두이거나 그 둘 모두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성을 구분할 수 없다.(290)

그녀는 동성애자들이나 성전환 수술자들 같은 음습한 성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선을 갖도록 요구한다.(291)

이것 말고도 많다. 그럭저럭 괜찮은 소설에 실린 당혹스러운 해설이랄까. 글쓴이의 인식론이 만들어낸 비극이랄까. 뭐, 이경의 글 이전에 등장한, 언급할 만한 글을 발견했다는 게 나름 의의라면 의의다.

2009/05/30 11:55 2009/05/3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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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혜진  2009/05/30 2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등장인물들의 말투가 흥미롭네요. 이 소설도 남자/여자 말투가 구분되어있는듯.
    • 루인  2009/06/02 1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쵸? 이런 구분이 꽤나 심한 편이에요.
      다만, 좀 흥미로운 부분은 트랜스남성의 말투가 유난히 '남성적'이란 점이죠. 이게 작가의 의도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웠어요. 흐흐
  2. 당고  2009/05/31 1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왕- 나도 블로그에 김미현에 대해 깐 적 있는데. 이 사람 페미니즘 문학평론으로 문학계에서 한 자리 해먹고 있는 사람이어요! 심지어 학교 다닐 때 수업도 들어본 적 있다능;; 정말 너-무-너-무- 싫어요-_-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이 넓다기엔, 그냥 이런 사람은 빼버리면 좋을 텐데;;;
    • 루인  2009/06/02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설마 이 사람이 같은 사람일까 했어요. ;;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이 넓다지만, 이런 경우엔 좀 당혹스러워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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