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일지 1: 김씨. 아파트 입주자. 1-1603 거주.
그날도 꽤나 시끄러웠다고. 사실 원주민들의 성격 나쁜 건 알고 있었으니,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래도 정도 껏 해야지. 어떻게 만날 시위를 해. 참나. 특히나 내가 살고 있는 집이 고층이라 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잘 들리잖아. 중간층에 사는 게 좋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냐. 정말, 그들이 떠들면 어지간한 소리는 다 들려. 그날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더라고. 그래, 내, 신경질이 나서 베란다로 나갔지.
응? 아, 그 애? 글쎄. 자세히 본 건 아냐. 그냥 시위꾼들 한테 한 소리 할까 하고 내다 본 거니까. 성질 같아선 물이라도 한 바가지 퍼 붓고 싶었는데, 괜한 빌미 잡히기 싫었서 참았지. 사람들이 단지 출입을 개방하라고 떠드는데, 술이라도 마셨는지 유난히 시끄럽더라고. 소주병을 손에 든 사람들도 많고. 아, 기억난다. 그들이 시위하고 있는 철망 근처에 어린 애가 주저 앉아 있는 거 본 거 같아. 확실한 건 아닌데, 누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거 같아. 나야, 조경으로 만든 물건이겠거니 했으니까. 근데 다시 생각하니 그 자리에 바위나 다른 물건이 있을리가 없잖아. 더구나 시위꾼, 그네들 완전 꾼인 거 같은데, 시위꾼들이 그 애가 앉아 있는 쪽으로 손지껌을 하는 거 같더라고. 술병을 그곳으로 던져 화풀이라도 할 것 같았거든. 아, 이제야 알 거 같네. 그들이 왜 그렇게 그곳을 향해 요란했는지.
암튼 그 자식들 모두 잡아 들여야 해. 그 놈들이 한 짓거리가 맞다니까.
이봐, 근데 형사님은 어디 출신이요? 원주민은 아니죠?
특이사항: 그는 사건이 발생한 후 입주자들 중 몇 명이 원주민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을 때 동조한 바 있으나, 조사 과정에서 발뼘하는 태도를 취함.


사건일지 2: 최씨. 아파트 입주자. 2-302 거주.
요란했죠. 제가 사는 집에선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아파트 단지가 그렇게까지 넓은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베란다 창문을 닫으려고 나갔다가 우연히 본 거죠. 원주민들 몇 명이 철망을 넘으려고 하더라고요.
무슨 생각을 했냐고요? 솔직히 뭐하는 짓인가 싶었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철망을 넘어 들어오는 건, 아파트 입주자들을 공격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면 뭐겠어요. 더구나 그들 손엔 술병이랑 새총도 있었다고요. 무슨 의도겠어요. 신고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몇 집은 유리창이 깨지고 털렸을 걸요. 확신해요. 이곳 원주민들 성질은 유명하잖아요. 아, 진짜, 다른 곳보다 집값이 싸서 입주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돈 좀 더 주고 다른 곳에 갈 걸 그랬어요.
그 애는 못 봤어요. 내가 사는 곳에선 안 보이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암, 그러고 말고.
특이사항: 경찰서에 해당 사건을 신고한 인물로 추정. ‘추정’은 주지하다시피 경찰서 전화에 발신번호가 뜨지 않았으며 전화국 조회에서도 확인되지 않음.


사건일지 3: 이씨. 원주민. 48-11 거주.
이봐, 김형사. 우리들 성격이 순하단 건 자네가 더 잘 알잖아. 물론 그 날 사람들이 다른 날보다 더 흥분하긴 했어. 그렇다고 욕설을 하고 누굴 공격할 사람들이 아냐. 자네, 여기서 하루이틀 산 것도 아니니 잘 알 것 아닌가.
뭐? 아니, 자네 도대체 왜 이래. 여기서 갑자기 내 술버릇은 왜 들먹여. 자네 이러긴가? 그래, 내 술버릇이야 좀 험하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아니잖아.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아파트 시공할 때부터 시공하고 나서도 계속되고 있는 피해를 생각 해봐. 그게 말이나 돼? 아니 어떻게 우리들에겐 말도 없이 갑자기 아파트 신축을 허가하더니, 공사 중에 받은 피해에 대해선 한 마디도 안 하고 말이야. 진정을 몇 번이나 넣어도 반응도 없고 …, 고발을 해도 기각이나 하고. 혹시 자네 뭐라도 받은 거 아냐!
아, 미안하네. 아니, 내가 말 실수를 한 거야. 미안해. 그간 시공업체에 쌓인 게 너무 많다보니 그만 …. 자네가 청렴한 건 내가 잘 알지. 아니, 화 풀게. 내가 정말 실수했네.
아무튼, 그날 아파트 단지 안엔 아무도 없었어. 내가 분명히 봤다니까. 사람들을 모으고 자리를 만드는데 그 정도도 확인 안 했겠나. 단지엔 개미 한 마리 없었어. 내 장담하네.
어디를 보고 있었냐고? 당연히 우리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시위를 진행해야 하니까. 그러면서 간간히 단지를 향하고.
특이사항: 원주민 대표. 당일 술을 마시고 확성기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경범죄로 고발된 상태.


사건일지 4: 방씨. 원주민. 48-13 거주.
글쎄. 있었나? 기억이 잘 안 나네.
내 평생 술이라곤 입에도 안 댔네, 이 사람아. 허허, 사람들이랑 같이 있었어. 그 자리에 빠질 수는 없잖은가. 그날 따라 분위기가 좀 고조되긴 했지만 특별할 건 없었고.
글쎄, 사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확실한 건 아니지만, 워낙 사람이 없는 곳이잖은가.
그쪽에? 글쎄. 난 주로 다른 쪽을 보고 있었네만...
특이사항: 마을 원로. 유난히 말을 아끼는 분위기. 숨기는 것인지 평소처럼 말을 아끼는 것인지 모호함. 곤란한 질문엔 허허, 웃고 넘어감.


사건일지 5: 윤씨. 아파트 경비원.
전 그날 지하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요.
뭐, 그러죠. 평소에도 원주민들이 시위를 자주 했죠. 어떤 날은 한 시간 정도 하다가 흩어지고, 또 어떤 날은 서너 시간 정도 했죠. 아마 매일 했을 거예요. 격일제 근무에다, 근무 장소도 돌아가면서 하거든요. 지하주차장, 아파트 지상 출입구, 아파트 단지, 내부 시설 관리. 그래서 어떤 날은 시위 장면을 못 보기도 해요. 지상 출입구에서 근무할 때만 확실하게 알 수 있죠. 지하에 있을 경우, 잠깐 바람 쐬러 나오는 경우에나 볼 수 있는데, 시간대가 안 맞으면 못 볼 수도 있으니까요. 다른 경비들이랑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매일 시위를 하는 거 같더라고요.
아이들이요? 단지에서 근무를 할 때면 원주민 아이들이 종종 철망을 넘어 오거나 틈새로 들어와요. 아파트에 사는 애들과 친한 애들이 몇 명 있는 거 같더라고요. 근데 어른들 사이가 안 좋으니까, 정문으로 오긴 힘들죠. 몰래 오는 거죠. 보는 족족 다 쫓아 내요. 그게 제 일이기도 하니까.
철망 보수를 해야 하긴 하는데 시공업체와 관리업체에서 계속 미루는 중이죠. 자칫 원주민들을 더 자극할 까봐요.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진 않다는 거겠죠. 진작 공사를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 아, 아뇨. 그냥 혼잣말이에요.
아뇨. 걔는 본 적 없어요. 사람들이 입주를 시작할 때부터 근무했지만, 사람들을 모두 아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대충 얼굴은 다 알아요. 하지만 출입구에 근무할 때면 거주자들 사진이 있어서 대조할 수 있거든요. 시간이 걸려서 욕 먹지 않냐고요? 아뇨. 그렇진 않아요. 금방 찾죠.
얼굴을 잘 모르긴 하지만. …. 그게, 사실은, 아, 이거 절대 비밀이에요. 절대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인데요. 출입구에 카메라가 있어요. 그래서 카메라가 사람들 얼굴을 자동 인식해요. 사람들이 출입카드를 찍어야 하긴 하지만, 그것으론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거죠. 얼굴 형태와 카드가 일치해야 문이 열려요.
주민들이 아냐고요? 설마요. 관리업체에서 이번에 시험 운영하는 거라, 아직은 비공개예요. 절대 아는 척 하시면 안 돼요. 여기서 짤리면 곤란하거든요. 가족 생계가 이 일에 달려 있거든요.
이런 것도 말해야 해요? …. 파트너와 같이 살아요. …. 그것까지 밝힐 필요는 없지 않나요?
아무튼 안면자동인식장치 때문에 제가 사람들 얼굴을 일일이 외울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걔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다들 학교 끝나면 학원 가느라 단지에서 노는 애들도 거의 없으니, 근데 그 자리에서 있었던 건 확실한 거죠?
특이사항: 관리실과 경비실에서 관리하는 사진을 확보할 필요가 있음.
2009/05/08 20:13 2009/05/08 20:13
Trackback URL : http://runtoruin.com/trackback/1463
  1. 당고  2009/05/12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계속 이어지는 거죠?
    미야베 미유키보다는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가 생각나는데요? 인터뷰라는 점과 각각의 관점이 조금씩 다르다는 게...... 전 아직 조각을 잘 못 맞추겠어요. 더 많은 정보를!
    • 루인  2009/05/13 1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제까지 쓴 걸 포함해서 총 6~7 분량으로 완성될 예정이에요. 이미 각각의 세부 내용도 다 짠 상태고요. 흐흐.
      미야베 미유키는 [이유]에서 고층아파트의 단지 개방 문제를 얘기하는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빌린 거예요. 흐흐.
      그러고 보면, [유지니아]가 떠오를 수도 있겠어요. 온다 리쿠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라서요. 헤헤.


      장르소설을 많이 읽는 당고는 몇 화 만에 사건을 간파할까, 궁금해요. 헤헤
open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