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장미 공주」(Little Briar-Rose) 혹은 「숲 속의 잠자는 미녀」(The Sleeping Beauty)란 제목으로 알려진 동화를 읽었습니다. 성인용과 아동용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동용으로 읽었어요. 재밌더라고요. 제가 기억하는 내용과 달라 더 흥미로웠어요. 전 막연하게, 마녀의 저주로 잠이 든 공주를 왕자가 구하는 내용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좀 재수 없었죠. 근데 아니었습니다. 아동용이란 점을 감안하고 읽어도 무척 흥미로운 텍스트였습니다.


어느 나라의 왕과 왕비 사이에 아이가 태어납니다. 둘은 너무 기뻐 큰 잔치를 엽니다. 그 나라엔 열세 명의 현명한 여인들이 있었는데, 요리를 대접할 금접시는 열두 개 뿐이라네요. 그래서 한 명을 안 불렀습니다. 열두 명의 여인들은 차례로 공주에게 선물을 합니다. 열한 번째 여인이 선물했을 때 초대받지 못 한 여인이 와서 복수합니다. 열다섯 살이 되면 물레에 찔려 죽을 거라고. 아직 선물을 주지 않은 여인이 죽지는 않고 100년 동안 잠만 잘 거라고 저주를 바꿉니다. 저주를 피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저주는 실현되기 마련. 공주의 미모가 유명하여 많은 왕자들이 공주를 보러 갑니다. 성 주변이 장미가시덩굴로 쌓여 실패합니다. 어떤 왕자는 가시에 찔려 죽었다네요. 그러다 한 왕자가 뒤늦게 소문을 듣고 시도합니다. 그때가 마침 100년이 지난 때라 쉽게 들어갑니다. 왕자는 잠든 공주의 미모에 반해 제멋대로 키스합니다. 공주는 깨어나고 둘은 결혼해서 잘 산다고 합니다.


예, 맞습니다. 왕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마법이 풀릴 시기에 성에 들어갔으니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왕자가 공주를 구했다는 식으로 이해된다면 웃긴 거죠. 공주를 구한 사람은 죽음을 백 년 동안의 잠으로 바꾼 여인이지요. 사실 접시가 모자라다고 초대하지 않은 왕과 왕비가 더 웃겨요. 아무래도 코미디 같네요.


「백설공주」(Little Snow White 혹은 Snow-White)라고 알려진 동화도 읽었습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로 더 유명하지요.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고, 이 창틀처럼 까만 아이가 있으면 좋겠어.”라고 왕비가 말하니 공주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왕비는 죽고 새엄마가 들어왔습니다. 그 유명한 거울도 나옵니다. 왕비는 여러 번 시도하여 공주를 죽이려 합니다. 사냥꾼, 허리띠, 독빗, 독사과를 이용하는데 독사과에서 죽은 것처럼 잠듭니다. 죽지는 않습니다. 난장이들은 슬퍼하여 유리관에 공주를 눕히지만 매장을 하지는 않습니다. 죽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 모습에 반한 왕자가 공주가 누워 있는 유리관을 자신의 성으로 가져 가려 합니다. 짐꾼들이 이동하는 와중에 유리관이 흔들리자, 공주의 목에 걸린 독사과가 “툭 튀어”나옵니다. 왕자는 그간의 정황을 얘기하고 결혼합니다. 그 후로 잘 살았다고 합니다.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고, 이 창틀처럼 까만 아이가 있으면 좋겠어.”라고 왕비가 말했는데, “피부는 눈처럼 희고, 입술은 피처럼 붉고 머리카락은 흑단처럼 검”은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림형제가 유럽인이란 게 확실하게 느껴지네요. 피부색이 검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왜 딸이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이상적인 미인상이 눈처럼 흰 피부와 피처럼 붉은 입술, 검은 머리카락이었을까요? 사실 전 여기서 다른 어떤 이미지를 상상했습니다(관련 글을 쓸 계획이라 여기선 생략하지요). 암튼 여기서도 왕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공주의 목에 걸린 독사과를 빼낸 건 왕자가 아니라 왕자의 짐꾼이지요. 근데도 왕자가 공주를 구한 것 같아요. 계급과 신분 정치죠. 공은 상관에게 벌은 부하에게.


제가 두 편의 동화를 읽은 건, 어제 읽은 어떤 논문때문이지요. 이 논문은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잠과 관련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매력적인 논문이에요. 이 논문에서 위에서 언급한 두 편의 동화를 같이 분석하고 있어서, 저녁에 도서관에서 복사하여 玄牝에서 읽었습니다.


앞서 썼지만, 다시 읽으니 무척 흥미롭더라고요. 왕자는 언제나 마지막에 뜬금없이 혹은 우연히 등장하지만 마치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려진다는 걸 깨달은 것도 즐거운 경험이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결말이 재밌어요. 일부 페미니즘 비평은 이 구절을 결혼이 여성의 삶의 종착지로, 궁극의 행복 단계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합니다. 동화를 다시 쓰는 작가들은 결혼을 거부하고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공주의 모습을 그린다거나, 공주를 흑인으로 그리기도 하죠. 전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란 결말이 공주에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라 왕자에게 해당하는 내용이지 않을까 의심했습니다.


프로이트란 양반은, 건강한 상태에선 시각적 쾌락이 접촉 쾌락으로 변화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눈으로 보았다면 그 다음엔 만지고 싶어 한다는 건가요? (일전에 유사한 내용의 광고문구가 등장하여, 뜨악했던 적이 있습니다.) 동화의 내용으로 돌아가면, 왕자는 언제나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습니다. 공주가 저주 받아 깊은 잠, 죽은 것 같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잠에 빠진 이후에야 왕자가 등장합니다. 왕자들이 발견하는 공주는 침대 위에서 잠들거나 유리관 속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사진에서 얘기하는 피사체라고 할까요? 「백설공주」의 경우엔 오직 시각으로만 접근 가능하고 접촉이 불가능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왕자들은 미모라는 시각 경험에 대한 욕망으로 공주들에게 접근합니다. 아동용이란 점을 감안해야 겠지만, 이 동화들에게 흥미로운 점은 시각 경험은 무척 많지만 신체 접촉과 관련한 경험을 기술하는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공주와 왕자가 만나는 장면도 눈을 마주친 후 반한다는 식이죠. ㅡ_ㅡ;;


이쯤되면,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실제 지시하는 인물은 왕자일 가능성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죠. 왕자는 시각적 쾌락을 원할 뿐 신체 접촉을 바라지 않는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피사체로서, 죽은 것만 같은 공주를 바라보고 싶을 뿐이죠. 살아 움직이며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공주를 원하지 않는 거죠. 그러니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란 결론은, 공주가 결혼하여 행복했다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왕자는 공주가 말을 하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자 너무도 무서워요. 움직이지 않는 피사체가 아니며 시각적 쾌락 이상의 존재로 다가오는 게 두려운 거죠.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란 성급한 결론은 왕자의 두려움, 공포를 은폐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림 형제가 1800년대 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이 혐의는 더 짙어지네요. 당대는 시각 경험을 중시하는 한편, 공장제 도시 산업화 과정에 따라 노동의 성별분업을 기획한 시기거든요. 이성애 결혼은 당대 사회를 유지케 하는 주요 제도였죠. 아울러 여성 해방 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이 발생하고 활발히 전개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남성들’이 움직이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여성’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결혼이 ‘여성’에게 최고의 행복이란 함의가 담긴 구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피사체로 존재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 공포를 은폐하는 구절일 가능성이 더 크네요.


뭐, 어제 밤에 이 동화를 읽으며, 그 전에 읽은 논문의 내용을 떠올리며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이러고 노는 걸 좋아해서, 어제 밤엔 무척 즐거웠습니다. 흐흐.


※한글 번역판은,
야코프 그림, 빌헬름 그림. 『그림 동화집』 이민수 옮김. 서울: 노블마인, 2005(제가 읽은 건 초판 4쇄의 2006년 1월 10일 발행판).
을 읽었습니다.
2009/03/25 11:49 2009/03/2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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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혜진  2009/03/26 0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화 넘넘 좋아해요 ㅎㅎㅎ 디즈니에서 망쳐버린 이야기가 많지만 원본은 매력적! 근데 제가 보기엔 "happily ever after"식의 결말은...그냥 단순한 귀차니즘이었을 확률도 있지 않을까요?ㅋㅋ
    • 루인  2009/03/27 14:34     댓글주소  수정/삭제
      푸핫. 크크크. 정말 귀찮아서 그냥 얼버무렸을 가능성도 있겠어요. 흐흐흐.
      초반엔 한창 삘 받아서 썼는데 쓰는 와중에 갑자기 귀차니즘 발동, 급마무리로. 크크크.
  2. 벨로  2009/03/26 13: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알고 있었던 건 왕자가 백설공주한테 키스해서 눈 뜨는 거였는데.. 찾아보니 그게 디즈니 버전이었군요. 원작은 그런 게 아니라니 왠지 맘에 들어요. +_+
    •   2009/03/27 1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동화 그 자체를 읽은지 오래될수록 쉽게 떠오르고 마는 게 디즈니 버전인 듯해요; 근데 디즈니의 인어공주에서는 인어공주도 안 죽고, 아주 자기네들 맘대로죠;;
    • 루인  2009/03/27 14: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디즈니 애니를 접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디즈비 너번은 거의 만행인가 봐요. 흐흐흐.
      그림 형제 동화의 아동용은 은근히 냉소적이고 재밌더라고요. 큭큭. 막연히 알고 있는 내용과도 많이 달라 의외로(!) 괜찮더라고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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