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 로드] 2009.03.15.일. 18:35. 아트하우스 모모. B4층 2관 C-4.


01
좋은 텍스트란 많은 말을 생산하는 텍스트라고 정의한다고 치자. 많은 말을 생산한다는 것이, 반드시 듣기 좋은 말, '정치적으로 올바름'에 충실한 말이란 건 아니다. 많은 논쟁을 유발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표출시킬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좋은 텍스트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적어도 내게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좋은 텍스트이다.


영화관을 나섰을 때 정신이 멍했다. [레이첼 결혼하다]와 같은 날 읽지 않아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동시에 어디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 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남성다움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찌질함(사랑 혹은 관심을 구걸하는 태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병"이라는 "여성의 신비"와 인종-계급 정치, 소통 (불)가능성과 관계 맺기, 광기-정신병의 의미, 또 뭐가 있을까? 이들 각각을 별개로 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주제로 얘기를 하던 적어도 네 가지 이슈 모두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어떤 주제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른 이슈들의 무게가 줄어들 뿐.


02
1960년대 초에 출간된 베티 프리단의 책, 『여성의 신비』는 페미니스트 운동의 제2의 물결을 일으킨 계기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당시 '여성'들이 겪고 있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병"인 우울증을 다루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여성'들은 공적 시장노동자의 위치에서 쫓겨나 가사노동자로서, '과학적 모성'을 실천하는 존재로 다루어졌다. 당시 '여성'들은 가사노동과 아동양육에 전념하며 많은 무력감, 상실감, 우울증 등을 경험했는데, 주류 담론은 '여성다움이란 역할'에 좀 더 충실해야만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력감은 가사노동에 좀 더 전념하고 아동양육에 헌신하면 해결된다고 주장했다. 프리단은, 주류 담론이 '여성'들을 '집안의 천사'로 만드는 구조를 비판하며, '여성'들이 직장을 가지고 일을 할 것을 제안한다. 프리단의 주장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제2의 물결의 시발점이자,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평가 받을 정도로.


프리단의 책은 이후,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받는다. 앨리스 워커 같은 이는 이 책을 읽지도 않았다고 혹평했다 한다(워커의 글에서 직접 읽은 건 아니고 다른 이가 간접 인용한 글에서 읽음). 벨 훅스 같은 이는 이 책을 자신의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하고 비판한다. 프리단이 얘기하는 '여성'은 미국의 대학교육 받은 중산층 백인 비장애 이성애 여성들이라고. 사실이 그랬다. '흑인 여성'들, '빈곤층 여성'들은 항상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을 하기 싫어도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벨 훅스는 프리단의 주장이 상당히 제한적인 범주로서 '여성'을 사용할 때만 타당하다고 비판한다. 프리단의 주장은, 여러 범주 수사로 제한한 '여성'을 '모든 여성,' '대표 여성'으로 만듦으로써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이들의 경험을 배제하고 있었다.


[여성의 신비]와 관련한 얘기로 서두를 시작한 건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시대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에이프릴(케이드 윈슬렛 분)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 부부의 중산층 계급, 교외 정원이 있는 집, 백인이란 인종 등등은 특정 계층의 경험이란 걸 명백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이 영화엔 표면적으로 백인이 아닌 것 같은 인종은 등장하지 않는다. 백인들만 살아가는 세계다. 아울러 낙태가 불법인 시대다(이와 관련해선 [더 월]ㅡ핑크 플로이드의 영화 아님;;ㅡ이란 영화를 참고).


에이프릴은 연극을 하고 싶지만 연기에 재능이 없어 무대에 더 이상 오르기 힘든 상태고, 프랭크는 자기가 가장 취업하고 싶지 않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에이프릴은 집에서 하루 종일 가사노동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프랭크는 자신의 천직을 못 찾아 억압받고 있다며 직장 생활에 불성실하다. 둘의 관계가 위기에 처할수록 에이프릴은 가사노동에 더 충실하려 하고, 그럴수록 우울증과 무력감, 고통은 더 커진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이프릴은 프랑스 파리로 가고자 한다. 언젠가 프랭크가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에이프릴에게 말했던 세계, 파리. 에이프릴은 프랭크를 설득하기 위해, 파리에 가면 자신이 국제기구의 비서직에 취직해서 일하고, 프랭크는 쉬면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찾으라고 한다. 프랭크의 현재는 프랭크의 본질을 억압하고 있으며, 프랭크의 아름다운 진짜 남성을 찾으라고 말하며.


에이프릴은 파리에 가고 싶다. 현재 사회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서직에 취직하겠다는 말엔 가사노동과 아동양육에 제한된 여성역할이 아닌 어떤 일을 하고 싶은 바람이 섞여 있다. 프랭크는 사실 파리에 가고 싶지 않다. 현재에 안주하며 살고자 한다. 다만 에이프릴이 자신을 '진짜 남자'로 부추겨 주자 기분이 좋아져 가는데 동의한다. 프랭크의 바람은 자신에게 여전히 '남성으로서의 매력'이 있으며 자신의 '남성다움'을 인정받고 '여성들'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강할 뿐이다. 그래서 나중에 어떤 계기로(스포일러일 것 같아 생략) 에이프릴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자 분노한다. 아니, 에이프릴에게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사랑할 것을 강요한다. 에이프릴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 한다. 사랑받지 않고 있는 상태,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남성성을 인정받지 못 하는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 한다. 그래서 분노하고, 진실로 찌질하게 사랑과 인정을 구걸한다. (난 그 장면에서 사랑을 구걸하는 태도를 느꼈다.)


이 찌질함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인물은, 다름 아니라 수학박사 학위가 있지만 신경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는 존 기빙스(마이클 새넌 분)다.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기피하는 인물이다. 그의 부모들 역시 존의 행동에 안절부절 못 하며 그의 모든 행동을 광기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존의 광기, 존의 미친 행동은 한 사회가 지배규범으로서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규범들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즉, 존은 암묵적으로 부재한다고 가정하는 규범의 찌질함, 규율들을 발화하여 모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에 미쳤다는 소릴 듣는다. 존은 에이프릴과 프랭크가 파리에 간다는 계획을 들었을 때 유일하게 축하하는 인물이다. 아울러 프랭크가 자신의 남성성을 인정받고 싶어 안달하고 있음을 발화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광기란 그런 거다. 지배규범이 금기하는 것들을 폭로하는 인물이 광인이며, 차마 말하지 못 하는 걸 드러내는 행위가 광기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어떻게든 치료하고자 한다. 사실 치료는 안 된다. 지배규범의 폭압을 체화하며 입을 닫을 뿐이다. 지배규범에 가장 유순한 몸이 되어 질문자가 바라는 대답만 하여 치료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뿐이다.


마지막 부분은 고통스러워서 생략. 차마 적을 엄두가 안 나서….


영화의 끝 장면은 흥미롭다. 존의 부모가 에이프릴-프랭크 부부와 관련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헬렌 기빙스는 새 입주자를 칭찬하며 에이프릴-프랭크 부부를 욕한다. 그 소리가 듣기 싫은 하워드 기빙스는 자신의 보청기를 끄며 그의 부인, 헬렌 기빙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장면은 소통 거부, 혹은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을 선명하게 상징한다. 왜냐면, 이 영화에서 에이프릴과 프랭크는 서로에게 내 말 좀 들으라고 소리를 몇 번이고 지르기 때문이다. 서로 처음 만난 순간을 제외하면 영화 내내 소리를 지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결국 서로 떠들고 있지만 그 어느 말도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 보청기를 꺼서 소리를 차단하는 것처럼. 소통 불가, 혹은 소통할 의지가 없는 태도가 어떤 파국을 일으키는지 암시하는 것처럼.


03
그나저나 요즘은 영화관에 며칠에 몰아서 갔다가 한 동안 안 가는 생활인 거 같다. 이제 한 번만 더 가면 3월엔 다 간 거 같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흐.


그리고 요즘 나의 영화 감상문은 좀 재미가 없다. 너무 태만한 틀로 쓰는 거 같아서. 게으르단 뜻이다. 반성해야 한다.
2009/03/16 12:50 2009/03/16 12:50
Trackback URL : http://runtoruin.com/trackback/1429
  1.   2009/03/17 14: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디서 이 영화는 (책을 기반으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그러듯;;) 책이 낫다는 소릴 줏어들어서 책을 읽으리라 버티고 있으나, 과연 그날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상태인 거죠, 전 =_=
  2. 라니  2009/03/18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몰아서 영화보기.. 그거 저도 해보고 싶어요 +_+
open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