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빈 강의실을 배회했다. 후치(노트북)가 담긴 가방을 매고, 손엔 책을 한 권 들고 두어 시간마다 자리를 옮겼다. 이래저래 일이 겹쳐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학과 사무실은 때마침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이런 이유만으로 빈 강의실을 배회한 건 아니다. 어차피 2월이면 일주일에 사나흘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니 예행연습이었달까.


이제 곧 졸업한다. 이 말은, 이제 곧 3년 반을 머물던 여성학과 사무실에서 떠나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머물던 곳이 연구실이었다면, 그리고 남는 자리가 있었다면 그냥 머물 수 있었으리라. 헌데 지금까지 머물던 곳은 공식적으로 행정사무실이다. 다만, 대학원생들 연구실이 없어 연구실을 겸했을 뿐. 그나마도 책상이 몇 없어, 사무실 겸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내게 자리를 비워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리를 비우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내심 떠나고 싶기도 했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무려 3년 반을 그곳에 머물렀다. 중간에 학교 정책에 따라 이사를 해야 했지만, 명패는 동일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면 썩기 마련. 몇몇 사람들은 내가 졸업해도 머무는 게 당연하단 듯 반응했다. 이런 반응을 한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건 내가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증거다. 한 공간이 한 개인에게 '당연함'으로 받아 들여 지는 순간이 바로 떠나야 할 때라고 나는 믿는다. 좀 더 일찍 벗어나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다른 구성원들에게 미안할 뿐.


아쉽지 않은 건 아니다. 난, 아침부터 밤까지, 일주일 내내 한 곳에 머무는 걸 좋아하는데 이제 이렇게 머물 곳이 없다. 이건 너무도 큰 아쉬움이다. 카페 같은 곳에 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 이젠 일주일에 사나흘을 어디서 머물까? 아무려나. 지금까지 고정된 자리에서 머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복이었다. 여성학과에서 살기 전에도 어떻게든 살았으니까. 그냥 살아가면 된다. 살다보면 새로운 길이 나오기 마련이다.
2009/01/07 16:12 2009/01/0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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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옹  2009/01/07 2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왜 제가 다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일까요.
    근데 정말 살다보면 새로운 길이 나오기 마련이라는 말씀.. 맞는것 같아요.. :-)
    • 루인  2009/01/08 14:4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고 보면, 왠지 아옹 님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음에도, 제가 머물렀던 연구실/사무실을 구경하신 것만 같은 느낌이에요. 헤헤.
      뭔가 새로운 생활 방식, 새로운 길이 나오길 기대하면서 살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헤헤. :)
  2. 혜진  2009/01/08 0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든 곳을 떠날때가 되었군요.
    좀 섭섭하시겠다...
    하지만 더 좋은 곳을 찾을 수 있을거라 믿어요 :)
    • 루인  2009/01/08 14:46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마워요.
      정말 시원섭섭한 느낌이지만, 이런 느낌이 곧 새롭게 정들 공간을 찾는 힘이라고 믿어요. 헤헤
  3. 벨로  2009/01/09 2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과의 이별도 힘들지만 공간과의 이별도 참 힘든 것 같아요.
    다시 마음에 드는 공간을 찾게 되시길 +_+
    • 루인  2009/01/10 1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마워요.
      정말 몸에 익은 곳이나 습관과 이별하는 건, 충분히 애도할 시간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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