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랜 시간을 후원했던 단체에 후원을 중단한다는 메일을 보냈다. 단 한 번도 단체 후원을 중단할 수 있다는 상상을 안 해봤는데, 후원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리고 참으로 건조한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며칠 전 어떤 회의에서, 꽤나 안 좋은 소식을 들었다. 아직 공개할 수 없는 내용들이긴 하지만, 후원을 중단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그 사건만으로 후원을 중단하겠다는 결정을 한 건 아니다. 그 전부터 그 단체에서 발행하는 월간지가 껄끄러웠다. 환경단체인데 환경과 친하지 않은 기업의 광고를 싣는 건 항상 당혹스러웠다. 아울러 운동을 하는 방식이, 일테면 고래와 관련한 캠페인일 때 아이들에게 "고래야 돌아와"란 피켓을 들고 있게 하는 식인데, 유치해도 이렇게 유치할 수가 있나.


물론 이런 건 각 단체의 성격과 방향에 따른 것이니, 이런 것 가지고 일일이 뭐라고 하긴 그렇다. 다만 나와는 안 맞는다는 것. 그래서 작년부터 후원을 그만둬야 하나, 하는 고민을 줄곧 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 발생한 어떤 사건을 전해 듣고 중단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며 홈페이지에 찾아갔을 때, 꽤나 당혹스러운 문구가 나를 맞이했다. 광우병과 관련한 집회를 알리며 "미친소"란 구절이 들어간 광고창. 그 구절을 읽는 순간, 확실하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미친소"란 구절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이 좀 충격이었다.

미쳤다는 것, 미침(狂)이 문제일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을 비정상적이거나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이 문제이지. 그렇기에 미친 소란 말은 문자 그대로 소의 어떤 상황을 드러내는 구절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현재 상황에서 미친 소는 상당한 혐오발화이다. 소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이 문제임에도, 질병의 원인, 공포의 원인을 소에게로 돌리면서 사용하는 말이 "미친 소"인데, 다른 단체도 아니고 환경운동단체라면 이런 용어와 관련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 아냐?


이런 용어를 분별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홈페이지 메인에 노출하는 것. 나는 이 단체가 표방하는 환경운동의 성격과 방향도 이젠 정말 모르겠다. 그런데 다른 환경단체에 새로 가입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거의 모든 단체에서 이런 식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어렵고 머리 아프다. 아옹님의 말처럼, 정말 지금은 [눈 먼 자들의 도시]와 [눈 뜬 자들의 도시]를 합쳐 놓은 상황인 것 같다.
2008/05/13 10:51 2008/05/1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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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니  2008/05/13 15: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에게 병이 생겨난 건 순전히 인간들이 탐욕 때문인 걸 알면서도 저 역시 <미친소>란 말을 아무 가책없이 쓰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워집니다. 정치적으로 옳은 말만 사용하기란 참 힘든 것 같아요.
    • 루인  2008/05/17 1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냥, 전, 미친소란 말이 너무 불편해서 그랬어요. 흐.
      그나저나, 오늘 뉴스에 고딩은 촛불집회 가고, 대딩은 학교 축제에 간다는 걸 듣고 참 '재밌다'는 느낌이었어요. ;;
  2. H  2008/05/13 16: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고래야 돌아와!" 를 왜 싫어하시나요. ^^ "고래야 돌아와!" 이 절실하고 귀여운 외침을!!!
    • 루인  2008/05/17 1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흐흐흐. 귀엽긴 해요. 흐흐.
      다만 이런 구호들을 아이들 여럿을 모아서 외치게 하는 방식이라, 그 저의가 너무 빤히 보여서 싫었어요. 흐흐
  3.   2008/05/13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얼마 전에 아프리카에서의 인권 및 구호 활동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그것도 마치 하나의 사업;;쯤으로 돌아가는 면이 적지 않아서 많이 고민되기 시작했어요. 꼭 필요한 일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긍정적이라고만 볼 수 없는 효과를 가져오는 이들도 있어서. 아 이것도 언젠가 포스팅 하고 싶었는데, 게을러서;;

    그나저나 '고래야 돌아와' 좀 많이 웃긴데요;; ㅋ
  4. 미즈키  2008/05/19 0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CNN뉴스로 잠깐 광우병 걸린 소를 봤는데, 왜 '미친소'라고 이름 붙였는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찾아볼 생각도 안함)
    보기에 너무 안쓰럽고 불쌍하던데..
    • 루인  2008/05/19 1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광우"가 아니라 힘들어하고 있는 생명으로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너무 아쉽고 속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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